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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선진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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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러자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공화국(북측) 기자들은 시키는 대로 하는데 이 부장 선생은 왜 그렇게 요구가 많습네까."

부아가 치밀어 반론을 펴다 보니 공방이 이어졌다.

▶필자="북측의 기자들에게도 이렇게 마음대로 합니까."

▶북측 관계자="이 부장 선생처럼 인터뷰를 강요하는 기자가 북측에는 아예 없습네다. 그리고 내친김에 말을 하겠는데, 북남관계 발전을 위해 좀 좋은 것만 쓰십시오. 만날 삐딱하게 나쁜 것만 쓰지 말고…."

▶필자="사실보도가 언론의 생명 아닙니까, 좋은 것도 쓰되 비판과 감시를 외면하면 남측에선 기자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모릅니까?"

▶북측 관계자="그래도 좋은 것만 써야 북남관계가 발전할 것 아니겠습네까."

대화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썰렁하게 대화를 끝냈다.

실제 북측은 언론을 그들식 사회주의를 유지하는 선전선동의 나팔수라고 인식하고 있다.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당의 선전선동부가 모든 언론을 지도하고 있을 정도다. 기자실과 브리핑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게 북측의 현실이다.

비단 북한만 기자실과 브리핑제가 없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의 국가들이 기자실과 정기 브리핑제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80년대까지 공산당 일당독재 하에 언론자유를 탄압해 왔던 구 소련의 국가들과 아프리카의 군사독재 국가, 중동 지역의 종교국가 등에서 기자실은 언감생심이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언론과 정치 자유를 탄압하는 국가'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려 왔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선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국가인 셈이다.

반면 미국 등의 선진국들은 기자실과 브리핑제를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의 백악관은 "기자실이 좁다"는 기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자실 확장 공사에 나설 예정이다. 영국.캐나다.뉴질랜드 등 의원내각제 국가들은 의회에 '프레스 갤러리(Press gallery)'라는 기자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기자들은 프레스 갤러리에서 의회뿐 아니라 연방정부도 비판.감시한다.

중국도 큰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고도 성장을 구가하면서도 정치.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중국은 최근 정보 공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05년부터 각 부처에 외사판공실과 별도의 '대변인제'까지 신설해 다양한 정보를 알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려 한다. 이른바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을 통해 알 권리의 핵심인 정부의 정보를 통제하려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치고 앉아 담합만 한다"고 비판했던 기자실은 그간 정보 공개의 창구 역할을 해 왔다. 정부 부처의 한 귀퉁이에 자리한 기자실은 정부의 은폐된 정보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정부는 1992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되짚어봐야 한다. 당시 헌재는 "표현의 자유는 정보에 대한 충분한 접근이 보장돼야 가능하며, 정부의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국민의 알 권리의 핵심"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기자실 운영과 공무원을 상대로 한 취재는 정부가 시혜적으로 베풀어 준 게 아니다. 알 권리를 위해 정보 접근권을 관행적으로 언론에 위임해 준 국민의 힘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정부가 알리고 싶어하는 것만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