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늉에 그친 「경상비 억제」/내년 정부 예산안을 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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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줄인다던 인건비 13.4% 늘어/「전년에 얼마 더하기」구태 여전
정부가 마련한 93년도 예산안은 한마디로 뚜렷한 특징이나 「철학」을 찾아볼 수 없다.
전체 규모면에서 정부는 경제 전체의 긴축을 내세워 예산증가율을 당초 경상성장률 정도(13%선)로 잡았던 것을 14.6%로 높임으로써 「숫자」가 각별한 의미를 갖는 우리 실정에서 예산긴축의 의미를 상당히 약화시켰으며 당초 「올 수준 동결」을 내세웠던 공무원 보수도 내년 하반기부터 3% 인상키로 결정,내년도 근로자임금 교섭에 미칠 기대효과를 상당폭 반감시켰다.
또 사회간접자본세의 도입이 정부내 부처간 알력과 정치권의 반발로 좌절됨에 따라 제도개선의 가시적 결과도 내보이지 못했고 국방부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가까스로 한자리수 증가로 묶은 방위비도 사실 따지고 보면 한자리수가 갖는 상징성 외에는 최근 여러해 계속돼온 「전체 예산증가율 이하의 방위비 증가방침」의 연장에 불과하다.
전반적으로는 정부의 표현대로 『경상경비와 소득보상적 지출을 비롯한 고정적인 소요지출의 증가를 최대한 억재해 국가경쟁력 강화분야에 투자를 늘린다』는 기본방침 아래 예산편성이 이뤄진 흔적은 엿보이지만 그야말로 「흔적」을 내는데 그친 정도다.
국가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지만 사업비는 재정투융자 특별회계를 포함해 전년도보다 14% 늘어나는데 그쳐 총세출증가율 13.3%와 별 차이가 없으며 최대한 줄였다는 인건비도 기존의 인상소요가 많아 13.4% 늘어났다. 예산 내용을 부문별로 뜯어봐도 연쇄부도 등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중소기업 지원을 42.6% 늘린 것이 눈에 띌뿐,농어촌 지원이나 사회간접자본투자,과학·기술 관련투자 모두 별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부처 할거주의와 전년도 예산에 「더하기 얼마」식의 타성적인 예산편성 방식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한 예산편성에서 국가경영의 어떤 철학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산규모의 적정여부는 정확한 잣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전년도보다 얼마가 늘었느냐는 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대체로 무의미 하다. 다만 내년도 1인당 세부담 증가율이 경상성장률보다 낮은 11.7%로 잡혀있고,조세부담률은 올해와 같은 19.1%란 점 등을 감안하면 14.6%가 늘어나는 내년 예산안이 「긴축적」이라는 정부의 해석은 대체로 받아들여도 무방할성 싶다.
추가편성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으로 올해는 규모가 3천억원 남짓으로 최근 수년간 3조∼4조원에 이르던 것 보다는 훨씬 적고 세계잉여금만으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부가 스스로의 약속을 어긴 것은 분명하다. 정부는 「올해는 추경을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렸을뿐 아니라 사안이 급하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넓게 보아 분명히 사업비에 속하는 신용보증 기관에 대한 정부 출연 1천5백억원을 반영,추경을 편성한다 해도 「사업비 등으로 쓰지는 않겠다」는 약속도 어겼다.
정부의 예산안이 확정됨에 따라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지만 정상적인 심의가 이뤄질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정상적인 국회운영이 어려워 보이는데다 정치권의 예산흥정 소지는 더욱 많고 이미 정부와 예산협의를 마친 민자당도 이후 벌어진 대통령의 탈당으로 협조자세가 과거와 달라질 가능성도 높아졌다. 자칫하다가는 법정기한내 예산안 동의를 받지 못하고 준예산을 편성,올 수준에 맞춘 경상경비만을 쓰다 새 정부 구성후 예산안의 수정·동의 절차를 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박태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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