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내가 하면 솔직한 칭찬, 남이 하면 알랑방구" 천태만상 아부백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그래픽 크게보기

요즘 '회장님의 방침'이란 개그 프로가 인기라죠.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에서 3월 시작한 코너입니다. 이 개그에서 부장.과장.대리는 각자의 '아부 신공'을 내세워 일합을 겨루죠. "나는 사장님 눈이 침침하면 인당수에 빠졌고 회장님이 지시하면 볼링 공으로 피구도 했어." "사내 축구대회에 내비게이션을 준비했지. 왜냐고? 사장님이 어디 계신 줄 알아야 그쪽으로 패스하지." 이 개그에 직장인들이 열렬하게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프로에 '사장'역으로 출연하는 개그맨 현병수씨는 "어쩔 수 없이 아부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구나 한번 해볼까 생각하지만 막상 입 열기 어려운 것, 아부. 인간관계의 윤활유일까요, 치사한 처세술일까요.

글=홍주연.김경진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사내 등산 대회였어요. 사장님이 산을 오르다 발 디딜 곳이 없어 헤맸죠. 모 부장이 손가락을 깍지 껴 사장님 발 아래 갖다 대더라고요. 사장님은 그 손을 밟고 올라갔죠." 무역업체에 다니는 어느 과장의 말이다. 사람들의 비난에 그 부장은 이렇게 변명했다고 한다. "내가 하면 충성이오, 남이 하면 아부다."

# 아부란 무엇인가=아부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비위를 맞춰 알랑거리는 것'이다. 영어 단어 '아부(flattery)'는 여기에 좀 더 긍정적인 의미가 추가된다. 프랑스어 'flater(어루만지다)'에 어원을 둔 이 단어는 '살살 어루만져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란 뜻이다.

일상 생활에서 아부에 대한 정의는 이보다 더 다양하다. "칭찬과 아부는 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접근하는 것이 아부죠." 사업을 하는 임준형씨의 풀이다. 아부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도 많다. '아부의 기술'의 저자 리처드 스텐걸은 "아부는 전략적 칭찬"이라며 사회 생활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권했다. ▶아부는 있는 것을 말하는 것 ▶아첨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 ▶아양은 말 대신 표정.행동으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란 말도 있다. 아부는 괜찮지만 아첨은 나쁘다는 뜻이다.

설문조사 결과 직장인들은 대체로 아부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week&이 취업정보 사이트 커리어의 회원 126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인 10명 중 4명(44%)이 "아부는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하다"고 답했다.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전체의 16%에 머물렀다. "아부가 평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응답자와 "내 상사는 아부를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도 각각 53%, 61%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또 응답자의 49%가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아부를 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커리어의 신길자 팀장은 "과거에 비해 직장인들이 아부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아부와 칭찬은 백지장 차이=아부는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이정석(35) 만인에미디어 팀장은 "아부 앞에 장사 없다"고 말한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아부는 정말 효과가 좋죠. 어려운 프로젝트를 앞두고 후배가 '이 일을 할 사람은 팀장님밖에 없습니다' 하는데 능력을 인정받는 느낌이었어요." 회사원 김정아(33)씨는 아부를 못해 손해 보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김씨의 팀이 경쟁사를 제치고 프로젝트를 따냈을 때였다. 일은 안 하고 아부만 잘하는 후배가 김씨 대신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리는 여기서도 통한다. 모 홍보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은 "직원 하나가 거의 매일 '오늘 젊어 보이시네요' '뛰어난 판단이십니다'라고 말을 걸어온다. 나중에는 부담스러워서 그 직원을 피하게 되더라"고 전했다.

그래픽 크게보기

아부의 고수들은 '타이밍'과 '관심'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상대에게 "애가 몇 살이냐"고 묻는 것과 "아들 돌잔치는 잘했느냐"고 묻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은 금물이다. '**의 사람'으로 찍혀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적절한 직언(直言)을 곁들이는 것은 필수다. 이민석(사업)씨는 "평소 출근을 늦게 하는데 직원 하나가 '사장님이 출근까지 일찍 했으면 경쟁사는 뭐 먹고살았겠느냐'고 하더라. 입바른 말을 기분 좋게 하는 그 직원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과 여 중 누가 '아부의 강자'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오영섭 차장은 같은 부서 여직원이 영 눈에 거슬린다. 회사 행사에 남편까지 동원해 안내를 맡고, 임원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해주는 등 지나친 아부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황진영(여) 팀장은 이와 반대다. "남자들은 사우나.술자리.골프 등 아부할 기회가 많습니다. 여자들은 시간.장소의 제약이 너무 많아요."

# 생활 속의 아부=직장 생활에서만 아부가 통하는 것은 아니다. 신세계백화점 '손석화' 매장의 한재윤 매니저는 고객에게 옷을 배달할 때마다 직접 편지를 쓴다. '저에게 행운을 주신 사모님. 사모님을 만나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사모님을 모실 기회를 주세요.' 한씨는 이 백화점의 디자이너 의류 부문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고 있다.

가정 생활에서도 적절한 아부는 필요하다. 회사원 최선아씨는 시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적절한 칭찬을 잊지 않는다. "어머님은 빨간색이 잘 어울려요" "머리를 자르니 더 젊어 보이시네요." 등은 최씨의 단골 메뉴. 그는 "맞벌이라 부족한 점을 말로 메우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성컨설팅 노주선 대표는 "아부는 다른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해 인간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라며 "남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면 아부도 학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씨는 아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아부는 수직 구조의 조직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성향이다.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고 조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그래픽 크게보기

고수들의 아부 특강

아부는 지나쳐도 탈이지만 못해도 문제다. 직업상 적절한 아부가 필요한 서비스.영업직 종사자들에게는 아부가 큰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써먹는 것이 낫다. 각계각층의 고수들에게 '아부의 기술'을 알아봤다.

# 초급용=아부의 기본은 '정확한 상황 파악'이다. 서울의 한 특급호텔 베테랑 직원도 "아부는 분위기 파악과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부부끼리 왔을 때'부인이 아름답다, 어디서 이런 분을 만났느냐'고 물어 보면 손님들이 좋아해요. 반면 부적절한 관계의 남녀에게 칭찬을 늘어놓으면 역효과가 나죠." 상대의 정보와 관심 사항을 알아두면 더 좋다.

전문가들은 외모 칭찬에서 한 발 더 나아가라고 말한다. "강의 중 옆 사람을 칭찬하라고 하면 대부분'잘생기셨네요'라고 말합니다. 너무 뻔한 말이죠." 한국인성컨설팅 노주선 대표의 말이다. 노 대표는 상대의 성격이나 능력을 칭찬하라고 조언한다. 이런 칭찬을 받으면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인정받고 있다고 느낀다.

# 중급용=아부는 아부 같지 않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부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도움이 된다. "행동은 쭈뼛쭈뼛, 표정은 어눌…. 저만의 아부 포인트죠. 입바른 소리를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할 말은 다합니다. 선배들은 제가 '아부 못하는 놈'이라면서 좋아하더라고요." 영화사에서 일하는 문지석(31)씨의 말이다.

조언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LG그룹에 다니는 송모(34) 과장은 여자 선배들과 육아 고민, 시댁 대처법 등에 대해 수시로 상의한다. "충고에 따른 뒤 '역시 선배 말대로 하면 잘되더라'고 말합니다. 신뢰받고 있다는 생각에 선배들이 나를 더 챙겨주더라고요."

아부는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개그맨 김태환(22)씨는 "선배들에게 '오늘 프로 재미있었어요'라고 하면 안 돼요. '나 선배가 춤추는 데서 뻥 터졌잖아'라고 말하는 거죠. 선배들이 확실히 술 한잔 더 사주더라구요."

# 고급용=아부의 고수들은 적절한 비판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9 대 1의 법칙'을 예로 들었다. "늘 칭찬만 하는 사람은 '아부꾼'으로 불립니다. 나쁜 얘기만 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하고요. 칭찬 90%에 비판 10%를 섞어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동료나 후배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전방위 아부'도 고급 기술이다. 물류업체의 한 전무는 부하 직원의 결혼 기념일을 챙기고 자녀들에 대해서도 수시로 물어 본다. "요즘은 부하 직원들에게 아부하려고 더 노력합니다. 업무 효율이 좋아져 결국 나한테도 이익이 됩니다."

전문가들은 아부의 긍정적인 측면을 심리학의 '피그말리온 효과'로 설명한다. 사람이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김범열 연구원은 "적절한 선을 지킨다면 아부는 조직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직원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