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 만들 한국사람 있었다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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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제헌국회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새 헌법의 초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훌륭하오, 우리 한국 사람 중에 헌법을 기초할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소."

그 헌법의 초안을 만든 현민(玄民) 유진오(1906~87.사진) 선생을 두고 한 경탄의 말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 헌법을 만들 때 헌법학 전공자는 오직 현민 한 사람뿐이었다. 이같은 건국 당시의 드라마같은 일화와 업적은 오랫동안 묻혀졌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최근 출간된 '지성의 길-현민 유진오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논집'(한국인문사회연구원 펴냄)은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새롭게 복원하고 있다. 현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열린 학술회의의 발표.토론문을 모두 실었고, 여기에 현민이 쓴 글 가운데 엄선한 논문.논설 6편을 함께 엮었다. 한국인문사회연구원(이사장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전 작업을 총괄했다.

현민은 대한민국 헌법의 토대를 놓은 법학자이자 교육자(고려대 총장)였으며, 문인(소설 '김강사와 T교수'의 작가)이자 정치가(신민당 총재)였다.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낸 '전방위 지성'의 면모를 '지성의 길'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현민을 통해 근현대사를 재해석하는 키워드는 '역할 분담론'이다. 우리 근현대사가 분열만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조화와 창조의 과정이기도 했음을 현민을 통해 새롭게 반추하게 한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의 경우 무력투쟁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력배양에 힘썼던 과정도 과소평가할 수 없음을 현민의 삶은 증언하고 있다.

홍일식 이사장은 "위대하고도 절묘한 역할 분담"이라며 "화해와 통합만이 절실한 시대정신임을 현민은 새삼 일깨우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독립투쟁과 실력배양의 길을 각각 걸었던 인물들의 역할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건설과 번영을 위해 조화를 이뤄냈다는 뜻이다. 홍 이사장은 "역할분담의 조화에 힘입어 2차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가들 중에 대한민국만이 근대산업국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현민은 실력배양쪽에서 역량을 과시했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1930년대 초반 이미 보성전문 교수로 강단에 섰다. 준비된 실력이 있었기에 해방 직후 우리 힘으로 헌법을 만들 수 있었고, 고려대 총장을 14년간 지내며 우리 대학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심재우 고려대 명예교수, 박영식 전 연세대 총장, 김인환 고려대 교수, 김중위 전 국회의원 등이 법학자.교육자.문학가.정치인으로서 현민을 재조명했다. 심 교수는 "현민은 사실상 최초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우리 헌법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심 교수는 또 "현민은 헌법을 근대적 헌법과 현대적 헌법으로 나눠 보았으며, 그가 기초한 헌법 초안에는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 헌법관과 현대적인 사회민주주의 헌법관이 아울러 반영돼 있다"고 분석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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