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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우포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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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Canon EOS-1 Ds MarkⅡ 70-200mm f5.6 1/90초 ISO 400

잔별이 희멀겋게 끔벅일 때 우포늪이 내려 보이는 언덕에 섰습니다. 새벽 4시40분입니다.

희뿌연 물안개가 검실거리며 일더니 어느새 어둑한 수면을 서서히 덮습니다. 물그림자 짙게 드리운 채 미동도 않던 백로도, 가녀린 줄기 바르르 떨던 물풀도, 삐죽하니 뻗은 미루나무의 밑동도 잠깐 사이 안개에 묻혔습니다. 고작 20분 흘렀을 뿐입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물 위로 쪽배 하나가 미끄러지듯 흘러듭니다. 사람 하나 겨우 띄울 만큼 자그맣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쪽배의 흐름으로 비롯된 물비늘이 물 가장자리까지 이내 퍼져옵니다. 그 순간 안개 속에 묻혔던 백로가 놀란 듯 후드득 깃을 치며 오릅니다. 5시28분입니다.

목포의 끄트머리 물속에 뿌리를 박고 수백 년은 족히 살았을 아름드리 왕버들에 햇살이 번집니다. 숲 그늘을 비켜 들어온 황금빛 햇살이 신록을 연초록으로 물들이고 일렁이는 물결에 윤슬이 번집니다. 6시35분입니다.

집안일을 끝낸 아낙들이 하나 둘 늪으로 들어갑니다. 오월의 봄볕이 아무리 따사로워도 물속은 아직 시립니다만 주저 없이 들어가 바닥을 훑습니다. 온종일 논우렁을 건져 올리느라 팅팅 불은 손마디에 아린 저녁 빛이 스며듭니다. 오후 6시 40분입니다.

우포늪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새벽 나절부터 해진 후까지 지켜봤으니 길다면 긴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억4000만년간 존재해 왔다는 우포늪의 기준으로 보면 이 모두 찰나의 순간입니다. 새벽녘 황홀했던 물안개도, 수십 년 예서 살아온 토박이들의 정겨운 삶의 현장도, 수백 년 신록을 틔우며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아름드리 왕버들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우포늪의 시간에선 스쳐 지나는 한순간일 뿐입니다.

사진의 대상을 정한 후 되도록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시로 드나들며 늪이 보여주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카메라에 담아 보세요. 보는 시간.날씨.장소는 물론 바람.안개.비에 따라 자연은 항상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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