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약관 고객위주로 바꾸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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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반 가계대출을 받으려는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복잡한 약관때문에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우선은 다급한 심정에서 낯선 금융용어로 만들어진 약관을 건성으로 보고 대출을 받았다가 나중에 문제가 발생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은행과 고객간의 합의에 의해 작성되어야 할 계약서에 여전히 많은 분쟁이 일고 있다는 증거다.
경제기획원의 약관심사위원회는 각 은행이 시행하고 있는 개별 약관중에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는 11개조항에 대해 무효 판정을 내렸다. 은행측이 일방적으로 담보금액을 늘리거나 기간을 연장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가령 빚을 갚지 못해 은행이 담보물을 처분할 때도 당사자의 동의없이는 은행이 임의로 처분시기나 방법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도 포함돼 있다.
금융시장 개방폭이 확대되면서 국내에 들어와 영업활동을 벌이고 있는 외국계 은행들의 서비스는 피부로 느껴질만큼 생활주변과 밀착되어 있다. 급히 돈이 필요할 때는 우리 은행을 찾아 달라든가,우리 은행의 약관은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 고객이 안심하고 저축도 하고 대출도 받을 수 있다는 등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한다. 어느 외국은행은 한밤중에도 대출상담에 응하고 있다. 금융산업의 서비스 경쟁은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은행들은 시대의 변화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고 「고객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약관」에 대한 수정의 주체도 되지 못했다. 옛날 일본은행들이 쓰던 약관을 그대로 베껴쓰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고객위주로 바꿔주는 것을 게을리해 왔다.
은행들이 스스로 이러한 문제해결에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은행감독원이 나서 수신부문과 외국환부문에서의 부당한 약관내용을 대폭 개선하는 작업을 작년부터 서둘고,경제기획원의 약관심사위원회도 금융기관 편의위주로 되어 있는 여러 조항들을 고치도록 판정을 내려야만 했다. 소비자보호원은 일반고객으로부터 들어온 불만의 목소리를 기획원에 전달하면서 은행들이 보다 진일보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조성을 촉구했다. 은행약관 개정의 당사자가 완전히 뒤바뀐 꼴이다.
당국은 이미 90년부터 대출약관을 기업기본약관과 가계기본약관으로 나눠 여신 부문에서의 부당한 사항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앞으로는 금융시장 개방화에 따른 은행영업의 경쟁촉진을 위해서도 고객 서비스개선이 이뤄지도록 더욱 일관된 행정력을 동원해야 한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이번 약관심사위원회에서 무효판정을 받은 일부 조항에 의해 담보물 멸실의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고객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대출금을 변제받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고객위주 영업으로의 변신을 보다 적극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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