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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서 돈대 출연료도 후했죠"|영화 5편제작… TV연속극까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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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배씨는 공보부산하 국립영화제작소의 감독으로 10년간 근무했던 문화영화전문가였다.
그의 설명.
『당시 나는 두편의 영화를 기획해서 홍장관에게 건의했어요. 하나는 「세계속의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한국과 한국인의 국제적 위상을 조명해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희갑영감의 전국나들이」라는 가제로 다른 지방에 사는 한국인들이 서로를 알게 하자는 취지의 영화였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이 앞섰던 것은 아니예요. 나와 친분있던 김희갑씨가 주연으로 미리 점찍혀 있었고요. 홍장관이 두 기획안을 갖고 청와대에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외화가 매우 귀하던 때라 대통령은 「해외촬영을 해야 하는 전자는 피하고 후자를 택하라」고 지시했다는 거지요. 공보부 예산에 제작비용이 잡혀 있지 않았던 탓에 홍장관이 공화당과 교섭해서 정치자금 일부를 얻어내 배우들 출연료도 후하게 주게된 것으로 압니다. 대본은 신봉승씨가 각색했고…타계한 김승호씨가 자기에게 주연을 맡기지 않았다고 대단히 섭섭해했었지요.』
노부부(김희갑과 황정순)가 8도에 출가한 딸들의 집을다니며 겪는 애환이 시리즈의 기둥줄거리였다. 정부주관인 만큼 촬영에는 관의 협조가 항상 뒤따랐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을 찍읕 때 오가는 차가 드물어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경찰이 나서서 차량통과를 막았다가 한꺼번에 풀어 도로가 승용차로 붐비는 모습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곤했다.
68년에는 속편격인 『팔도강산 세계편』을 제작하게 됐다. 김희갑영감 부부의 자녀나 친지가 해외 곳곳에서 한국인의 긍지를 느끼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내용.

<중정부장의 "특혜">
김씨는 이때 해외로케를 준비하던중 김형욱 당시중앙정보부장과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암달러가 이들의 인연을 중개해 주었다.
『해외촬영기간은 4개월로 잡혀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외국에 나갈때 1백달러가 지참할 수 있는 한도액이었지요. 그 금액으로는 담뱃값도 안되겠길래 고심끝에 암달러를 융통해 몰래 갖고 나갈 생각을 했습니다. 한일은행의 잘 아는 사람에게 이 일을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암달러 1천달러를 바꾸다가 정보부요원에게 덜컥 걸려들었지 뭡니까. 김씨도 그 은행원과 함께 중앙정보부로 끝려갔다. 그러나 유명연예인인데다 『팔도강산』으로 정부의 업적홍보에 톡톡히 기여한 김씨는 닦달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김형욱부장을만나 도움을 받게 된다.
『정보부간부의 주선으로 남산에 가서 김부장을 만났어요. 언제 떠나느냐, 몇 개국을 도느냐, 얼마나 체류하게 되느냐 등을 묻더니 호탕하게 「4개월이나 계실 예정인데 1천달러갖고 되겠소. 야, 한 5천달러 바꿔드려!」라고 결의 부하에게 지시하더군요. 얼떨떨합디다 .극구 사양하니까 내 돈 1천달러를 그 자리에서 돌려주면서 「그럼 이 돈이라도 갖고 출국하시오. 통관은 걱정말고. 사나이 주머니에 돈 천달러도 없이 어떻게 외국에 나갑니까」라고 해요. 또 「해외 어디든 우리 애들이 공관마다 파견돼 있으니까 돈이 필요하면 사인만 해주고 받아 쓰세요.」라고 선심을 쓰더군요. 그 빽 덕분에 무사히 외화밀반출(?)도 하고 해외 여기저기서 모두 1천5백달러의 정보부 돈도 꾸어썼지요. 물론 귀국하자마자 갚았습니다만.』
69넌10월 김형욱이 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난 뒤 얼마후 김씨는 조선호텔부근의 「멕시코」라는 술집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아이고! 부장님』이라며 김씨가 반가워하자 김형욱은 『난 이제는 부장이 아니오. 날개 잘린 솔개신세요』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그날 김씨는 김형욱 몰래 그의 술값을 치러 주었다(김형욱은 그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권력을 잃은 자신을 요정으로 초대해 술을 사 준 D일간지 경영진과 함께 김희갑씨의 이날 호의를 감회어린 어조로 구술하고 있다).

<신봉승씨 집필사양>
모두 5편의 영화제작·흥행이 끝난 뒤에는 『꽃피는 팔도강산』이라는 제목의 TV연속극(KBS)이 기획됐다. 그러나 유신치하의 정치적 암흑기에서 박정희정권에 대한 일방의 염증도 깊어가던 무렵이라 드라마를 대하는 눈길도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꽃피는 팔도강산』의 대본집필을 의뢰받았던 인기 방송작가 신봉승씨(59)가 집필을 극구 사양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원고료에다 새마을훈장도 주선해 주겠다는 조건이었지요. 내가 동양방송(TBC)에 전속돼 있어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니까 윤주영 문공장관은 「TBC측의 양해를 얻어 놓을테니 염려말라」는 거예요. 친한 친구들과 의논했더니 괜히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다며 한결같이 말려요. 그래서 아예 잠적해 버렸습니다. 문공부와 KBS에서는 나를 찾느라 비상이 걸렸지요. 인천 올림푸스호텔, 서울의 앰배서더·세종호텔을 열흘 가까이 전전했습니다. 결국 필자는 윤모씨로 바뀌었습니다.』(신봉승씨)

<모국방문사업 시작>
1975년 9월23일, 『꽃피는 팔도강산』 촬영차 대관령의 젖소목장에 가있던 김희갑씨는 서울에서 급한 전갈을 받았다. 중앙정보부의 김영광국장(현민자당의원)이 『즉시 서울로 와달라』고 다급하게 요청한 것이었다. 얼마나 채근을 해댔던지 김씨는 당시 완공단계이던 영동고속도로를 개통식도 하기전에 달려(정보부의 협조덕분에) 다음날 오전 1시쯤 서울에 도착했다. 김국장의 주문은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뽕짝가요를 당장 배워서 오늘(24일)오후 열리는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환영행사장에서 한껏 구성지게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70년대에 우리 중앙정보부가했던 공개적인 사업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는 조총련계 모국방문 사업은 이 해에 처음 시작됐다. 그날 김씨가 불과 반나절만에 익혀불렀던 『불효자는 웁니다』는 6백여명의 재일동포가 모여있던 장충동 국립극장을 진짜 울음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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