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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일제시대 서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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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어느 시기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가운데 흰 건물이 총독부 건물이고, 그 바로 왼쪽으로 경회루와 근정전의 지붕이 보인다. 경회루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2층 기와지붕이 건춘문 북쪽으로 옮긴 광화문이다.

▶위의 사진과 근접한 위치에서 찍은 최근 사진. 원래의 위치에서는 시야가 숲에 가려 조금 높은 곳으로 이동해 촬영했다.

월간중앙총독부 건물에 밀려난 비운의 광화문 모습이 담긴 컬러 사진 한 장이 입수됐다. 1927년 이후 어느 시기 경복궁 일대를 담은 이 사진은 김종영 (주)혜원까치종합건축사사무소 설계본부 소장이 입수해 간직하고 있던 일본 그림엽서다.

남산을 배경으로 경복궁과 옥인동 일대를 조망한 사진은 조악한 컬러와 색이 번진 상태로 보아 흑백사진 위에 컬러 물감으로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엽서의 앞면 사진 아래 부분에는 莊內より京城府內を望む’, 뒷면에는 ‘割烹淸香園別邸白運莊’라고 씌어 있다. ‘갓포 기요카의 별장인 백운장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라는 뜻이다.
, 뒷면에는 ‘割烹淸香園別邸白運莊’라고 씌어 있다. ‘갓포 기요카의 별장인 백운장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라는 뜻이다.

백운장의 위치는 현 종로구 청운동이 옛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을 합친 곳이라는 기록과 사진의 시각으로 보아 자하문에서 가까운 인왕산 중턱쯤으로 추측된다.
사진의 왼쪽 숲,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바로 북쪽으로 고개를 내민 2층 누각의 광화문이 보이고, 중앙에는 신축된 조선총독부 건물과 그 바로 왼쪽으로 경회루와 근정전이 나타나 있다.

총독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아야 할 광화문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일제의 경복궁 파괴 음모 때문이다. 일제는 경복궁의 홍화문 일대를 철거한 데 이어 1926년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완공한 후 총독부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강하게 반발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일본의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ㆍ1889~1961)였다. 조선과 조선의 문화에 우호적이었던 야나기는 <요미우리> 신문 등에 실은 ‘아! 광화문이여’라는 글을 통해 광화문을 철거하려는 총독부의 처사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를 기화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총독부는 광화문을 철거하는 대신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다.

따라서 이 사진의 촬영 연대는 1927년 이후 어느 시기까지로 비정할 수 있으나 사진의 상태로 보아 더 이상의 추측은 불가능하다.

광화문은 개화기인 1885년 대원군의 중건에도 이후 숱한 시련을 겪었다. 그 첫 번째 시련이 바로 총독부 건물에 밀려 철거 위협을 간신히 모면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던 이 시기다. 이후 광화문은 6ㆍ25 당시 폭격당해 문루 부분이 두 동강나기도 했으며 1969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으나 원형과는 거리가 있다는 비판에 시달리다 현재 원래 위치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된 상태다.

글 이항복/사진제공 김종영/현재 모습 촬영 권태균

<월간중앙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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