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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시인 조기천 모스카바서 재조명 작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북한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행가 『휘파람』의 작사가이자 장편 서사시 『백두산』으로 유명한 시인 조기천을 추모하는 문학 행사가 빠르면 9월중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한국문학 전공자인 레프 콘체비치 박사, 1960년 시인 조기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엠이바노바 여사, 조 시인의 아들이자 현재 러시아 사회과학센터 부 소장인 조욱진씨 등은 지난 7월 초순 조 시인 탄생 79주년인 올해 조 시인을 추모하는 모임을 갖기로 하고 현재 구체적인 행사 준비에 착수했다.
콘체비치 박사 등은 한국 해방을 전후해 이상화·나도향·김남전·임화·손세룡 등과 함께 한국 문학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조기천 시인이 냉전으로 인한 남북 분단 때문에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올해부터 조 시인의 작품세계·생애 등을 정확히 알리는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콘체비치 박사는 북한은 60년대 초까지 『백두산』을 비롯한 조 시인의 작품중 역사성 짙은 시들을 집중적으로 배포, 교육했으나 이후 북한의 문학형태가 김일성 주체 형태로 바뀌면서 중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콘체비치 박사는 조 시인은 서사시 뿐만 아니라 서정성 짙은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러시아에선 53년 제트키스(아동문학)출판사에 서 『조기천 시집』이 출간된 이후 많은 학자들이 조 시인을 연구·분석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5∼6명이 된다고 말했다.
콘체비치 박사·이바낸여사·조욱진씨 등에 따르면 조 시인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조 시인은 1913년 12월 우수리스크에서 출생하여 51년7월31일 평양에서 북한측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연합군의 비행기폭격에 의해 사망했다.
37년 스탈린 시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극동 등지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조기천도 카자흐로 이주됐다.
이후 문학을 좋아하던 조 시인은 37, 38년 2년동안 크질오르다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소련당국은 조선인들에게 카자흐 이외로 옮겨다니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한달에 한번씩 거주증명 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 조시인은 이러한 당국의 명령을 거부하고 모스크바로 가 고리키 문학 대학에서 문학공부를 하다 발각돼 39년 2월부터 5월까지 감옥에 갇히게 된다.
41년 독소전쟁이 시작돼 조 시인도 강제로 소련 군대에 징집,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이후 조 시인이 배속됐던 군대가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했고 이때 조 시인은 조선말을 안다는 이유로 조선에 관한 정치적 문서를 조선말로 옮기는 일을 전담했다.
당시 조시인의 계급은 카피탄(대위)로 조선인중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45년 일본·소련의 전쟁 개시로 조시인의 부대는 다시 조선으로 진출했다.
조시인은 이때 스티코프 장군 휘하에서 소련 소식을 한국말로 옮겨 신문을 만드는 작업을담당했다.
당시 같이 신문 만드는 작업을 했던 사람 가운데엔 후에(56년) 북한 부수상이 된 조영철·김원봉 등도 있었다.
이후 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된 후 조시인의 부대는 평양을 철수, 소련으로 돌아갔지만 조 시인은 몇몇 인사들과 함께 평양에 그대로 남았고 이때부터 조선작가 동맹 부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6·25전쟁중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조 시인은 51년 7월 31일 비행기 폭격의 파편에 맞아 사망한다.
조시인의 아들 조욱진씨는 『아버지가 공산주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데올로기성이 짙은 시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서정시·서사시에는 이데올로기 선전·선동성이 없는 작품들이 많다』며 『이제 냉전이 끝난 상황이므로 아버지의 작품과 시 세계도 한국의문학자들이 제대로 평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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