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못 가면"섭섭"떠나도"불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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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업무에 치여, 자리를 비울 줄 모르는 상관의 눈치를 보느라, 즐길만한 경제적 여건이 못돼서 하는둥 마는 둥했던 휴가는 옛말이다. 공직도 직장임을 강조하는 신세대의 등장으로 공무원들의 휴가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정부도 이 같은 세태를 반영해 85년부터는 전 직원들을 상대로 신청을 받아 되도록 휴가를 갖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공무원들에게 여름휴가는「제한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피서요? 이 달 말에 고향개울에 가서 발이나 담그고 올 생각입니다. 하지만가야 가는 거지요.』
내무부에 근무하는 한사무관의 말이다. 일단 휴가계획은 잡아놓았지만 국회도 있고 혹시 갑자기 수해라도 닥치게되면 연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관광지는 포기하고 일단고향으로 계획을 잡아놓았다는 설명이다.
공무원들의 여름휴가는 이처럼 돌발적인 사태가 많은데다 시기적으로 오히려 행정수요가 늘어나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특히 올해는 과소비억제와 일하는 분위기조성을 내세워 휴가일수를 예년의 6일에서 4일로 줄였다.
서울시는 한술 더 떠서 신임시장에 대한 업무보고 등을 이유로 3일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부산시는 성수기를 피해 8월10일 이후에 여름휴가를 실시토록 해 미리 가족들과 계획을 세웠던 직원들의 불평이 크다.
그래도 이 정도는 나은 편이다. 아예 여름휴가는 꿈도 꾸지 못하는 공무원들도 많다. 내무부의 재해대책본부 상황실 근무자, 기상청 예보관계자, 보사부의 방역·재해복구·불량식품단속 담당자, 일선 시·도의 재해대비·행락 질서 단속관계자 등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후에나 휴가가 가능하다. 보사부 신동균 방역과장은『콜레라·식중독 등의 예방활동에 여름을 빼앗겨 아버지 노릇 못하는 직원들이 안쓰럽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지만 공무원들에게는 업무이외에는 엄격히 제한돼있다.
K시의 말단공무원인 권모씨(45)는 89년 여름휴가기간중 시장의 승인을 받지 않고 집안 일로 사흘동안 일본의 친척집에 다녀왔다가 감사원감사에 적발돼 1년4개월 동안「한직」으로 밀려났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남의 휴가 챙기기에 바쁜 자리에 있는 공무원들의 경우는 휴가철이 고역스럽기까지 하다.
여름휴가철만 되면 상급관청 간부나 친척 등의 숙소·비행기·골프장 등 예약 청탁이 폭주하고 VIP행차에는 뒤치다꺼리에 업무마저 팽개쳐야하는 것이 관광지 간부급공무원들의 처지다.
경찰간부들은 우스갯소리로 유명관광지의 서장을 지낸 경력을 『○○기생을 지냈다』고 말한다. 휴가철은 불론 평소 주말 등에 서울에서 자신의 조직 간부뿐 아니라 유력 인사가 내려오면 각종 스케줄 챙기기와 함께 지방특산물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어 생긴 표현이다.
피서철 30∼40일전에 예약이 끝나는 제주도 등 1급 관광지의 관광식품업소담당공무원들은 뒤늦게 상급자나 동료들에게 몰린 청탁을 떠맡고는 호텔지배인이나 객실부장을 찾아가 사정하기 일쑤여서 곤혹스러운 여름이 되고있다.
공항에 근무하는 경찰들의 경우는 폭주하는 비행기표 부탁을 선별 처리한 뒤 나머지는 대 기자명단에 올려 특별기가 뜨면「경찰가족 전세기」가 되어버리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한다.
공무원의 여름휴가. 마음은 9O년대, 여건은 7O년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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