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 될 각오로 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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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마지막 순간에 양보했다. 마주보고 달리는 한쪽 기차를 몰다 충돌 직전인 14일 밤 방향을 튼 것이다.

전날 광주에서 5.18 기념 마라톤을 뛰며 "한번 더 양보하라고 말할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느냐"라고까지 했던 그는 이날 "어리석은 사람이 될 각오를 하고 결심했다"고 했다.

무엇이 이 전 시장의 발길을 돌리게 했을까. 기자회견에서 이 전 시장은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당원들과 의원들의 간절한 열망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의 원로를 비롯해 지난 며칠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접촉했지만 결단은 그의 몫이었다.

조언자들의 의견은 한결같이 "1위 후보로서 당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과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강경파인 양 딴청을 부렸지만 내부적으론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줄기차게 불어넣었다. 강경파가 우세했던 캠프 내 분위기와는 달랐다.

결국 이 전 시장은 '결단'을 앞세워 온건론을 택했다. 이런 결정엔 '통 큰 정치인, 대통령 후보스러운 모습을 보이자'는 원칙이 한몫했다.

재.보선 참패 뒤 한나라당을 강타했던 지도부 교체론 때부터 그가 일관되게 지켜온 컨셉트이자 이미지 전략이다. 측근들은 "강재섭 대표의 당 쇄신안을 받았고, 중재안을 받았으며, 여론조사 반영 방식까지 양보했다"며 '세 번의 양보'를 강조한다.

여론조사 항목을 양보하더라도 크게 불리할 게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한 것 같다. 그는 최근 중앙일보 5월 11일자 대의원 상대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에게 2%포인트를 앞섰다. 대의원.당원의 표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져도 나쁘지 않다는, 최고 경영자(CEO) 출신다운 치밀한 표 계산 결과일 수도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캠프 내부에서 이런 반전의 드라마를 진작부터 검토했다는 징후도 있다. 5월 12일자 중앙일보에 '이명박 양보 가능성?'이란 기사가 나가자 측근 의원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몰고 가면 안 된다. 양보 가능성은 전무(全無)하다"고 항의했다. 되짚어보면 그의 캠프가 '5.14 결단'이라고 부르는 양보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처럼 느껴진다.

한번 내려진 결정이 발표되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는 이날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다가 14일 새벽녘에야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당이 있어야 이명박도 있다"는 게 고민의 요체였다고 한다. 오후 3시쯤 서울시당 당원 교육장을 찾은 이 전 시장은 강경 일변도이던 전날과 사뭇 달랐다. "나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함께하는 승리를 바란다"고 했고, 또 "누가 함부로 당을 깨겠는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도 했다.

오후 5시가 넘어 행사장을 떠난 이 전 시장의 카니발 승합차는 곧바로 개인 사무실인 안국포럼으로 향했다.

친필로 기자 회견문을 쓰기 시작한 그는 여의도에 머물던 박형준 의원을 불러 문안 작성 작업을 돕게 했다. 그 시각 여의도에서 측근 의원들은 강.온파로 갈려 토론 중이었다. 이 전 시장의 결심이 의원들에게 즉각 전달됐다.

한나라당 내분 사태를 진정시키는 극적인 기자회견은 이렇게 해서 이뤄지게 됐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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