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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위기 오면 정권지키는 역할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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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16년 정치 인생의 풀스토리를 5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월간중앙>에 고백했다. 그는 최근 조사를 받은 선앤문 자금 1억원에 대해 "대선 승리에 들떠 나태하고 부주의했던 결과"로 규정했다. 정권 초기 국정 난맥상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통감한다"고 시인했으나 선앤문 자금 외 어떠한 불법 자금도 수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정권의 운영'에 완전히 손을 떼고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또다른 위기 상황에서 정권을 지키는 역할을 맡을 것이란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편집자]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노무현 사단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16년간이나 노대통령을 보좌하며 측근 그룹 내에서도 위계서열을 초월하는 '존재의 힘'을 과시해왔다. 그는 이번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24살의 나이에 노대통령에게 순정을 바쳤다"면서 "노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도 변함 없이 그를 모시고 미래를 함께 하겠다"는 소회를 내비쳤다.

그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 근대 러시아를 만든 피요트르 대제, '혁명은 소수가 한다'고 했던 낫세르, 그리고 유목민족의 정신적 제왕 징키스칸을 신봉해왔다. 이들은 그의 정신적 스승인 동시에 이념적 코드이며 영감이었다. 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근본을 세우며 기풍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이들의 역사적 소요(逍遙) 통해 배워보겠다고 했다.

이광재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소학>이다. 엄청난 다독가로 알려진 그가 <소학>에 매료됐다는 것은 다소 싱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소학>에 나오는 글귀 중 "공부하기를 힘써라,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하라"는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 평범한 이 글귀는 이광재의 성공 과정과 미래의 지향을 함축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수평선과 지평선을 보며 자란 사람, 그리고 큰 여행을 한 사람 중에 대인(大人)이 나온다고 믿고 있다. 그에게 있어 큰 여행은 방대한 '독서'(공부)를 의미하며 '독서'는 사색하고 분석하며 전망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자양분이다. 그가 탁월한 기획가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같은 그의 지론을 꾸준히 실천해왔기 때문인데 그가, 또는 그로 대표되는 노대통령의 386 그룹이 요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인터뷰는 그가 검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이틀 후인 12월 14일 이뤄졌다. 미묘한 시점에 기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정치인의 고정 관념을 깨보자는 것이 기자의 제안이었고 그는 의외로 담백하게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인터뷰는 그의 평창동 집 근처 한 호텔에서 4시간 가량 진행된 후 그의 단골 포장마차 '절벽'에서 1시간 가량 더 이어졌다. 소주 한병씩을 비우고 취기가 오르자 그는 연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대선 직후라도 영수증을 챙겨 정상적으로 처리했어야 했는데 대선 승리에 취해 태만하고 부주의했어요..."

-검찰 조사 굉장했나요? 잠도 안재우던가요?

"아뇨....잠은 좀 잤어요."

-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13일로 인터뷰 날짜를 잡아놨는데 검찰 출두했을 때 구속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봤거든요. 구속되면 인터뷰는 없는 거니까 걱정했죠. 그리고 또 우려했던 것은 이 전실장이 돈을 받아 사용(私用)한 혐의가 밝혀지거나 안희정씨가 돈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하거나 하면 이 전실장이 거짓말을 한 게 되잖습니까. 그렇게 됐을 때는 제가 굉장히 후회했을 것 같았습니다. 저런 사람한테 뭐하러 인터뷰를 하자고 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럴 리가 없지요. 안희정씨가 받은 돈을 왜 받지 않았다고 하겠어요."

-검찰 나올 때 그랬잖습니까. 그 돈 말고는 없다고 말이지요. 정말 믿어도 됩니까.

"대선 때 제 역할이 그랬잖습니까. 저는 돈을 만지는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받은 그 돈은 유일하고 특수한 케이스였어요."

-왜 영수증 챙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 후회가 됩니다. 그 때 사실 영수증이 귀할 때였어요. 쉽게 구할 수가 없었어요. 총액 한도에 걸려가지고... 그런 측면도 있고 대선 후에라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대선 승리 후에 승리감에 젖어 나태해진 측면도 있고... 아무튼 정말 국민에게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돈을 받았으면 당의 공식 대선자금 창구에 줬어야지 왜 안희정씨에게 줍니까. 당시 안씨가 돈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지금 그런 문제는 제가 말하기 곤란합니다. 제가 뭘 숨기느라 그런 것이 아니고 아직 검찰 조사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특검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수사받을 때 진술해야 할 사안을 언론에 미리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 질문은 이제 그만하시지요."

-저는 요즘 참 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요. 박지원, 권노갑씨의 경우 이익치, 김영완씨와 수백억원의 돈을 받았느니 안받았느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차떼기는 또 뭡니까. 국민은 참 허탈합니다. 몇천만원 빛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요."

"뼈를 깎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권 전체가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저부터 반성하고 실천하겠습니다."

이광재와 안희정의 운명

-안희정씨와 이광재씨의 운명이 대선 후 갈렸잖아요. 한 사람은 청와대를 갔고 한 사람은 당에 남았고... 안희정씨 기분이 별로였을 것 같아요.

"당시 나라종금 사건이 불거졌던 것도 분명히 이유가 됐긴 했지요. 당에 남아 일을 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도 했을 테고... 사실은 저도 처음에는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정권을 만든 사람, 정권을 운영하는 사람, 정권을 지키는 사람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정권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운영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빠지자고 했지요. 이게 안희정씨와 저의 공통된 인식이었어요.

집사람이 그러더군요. '당신 성공했다. 한국을 뜨자. 40전에 뭔가 뜻을 세워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면 성공한 것이다.' 안씨와 저는 대선 직후부터 외국으로 가자는 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외국생활을 불쑥 계획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엔 정권 내부에 들어가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청와대 상황실장에 임명된 것은 대통령의 뜻이었습니까.

"일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요. 일단 들어가자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계속했어요. 정권을 만드는 사람과 운영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풍토 상 대통령의 측근은 시간이 문제이지 언젠가는 상처를 입을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몸을 낯춰 국장(행정관)급으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국정상황실장엔 다른 사람이 내정되기까지 했습니다.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 신계륜 당선자 비서실장이 반대했습니다. 두 분의 논리는 상하관계가 명실상부하지 않을 경우, 그때 생기는 불협화음은 또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상황실장을 맡게 된 것이죠.

처음에 제가 노 당선자에게 그랬어요. '측근은 반드시 다친다. 그러니 제가 몸을 낯추겠다'고 말이지요. 서너 차례나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대통령께서도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문희상 실장 내정자, 신계륜 실장이 그래선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죠. "

-이광재의 국정상황실이 막강하다는 얘기가 파다했습니다. 특히 인사에 개입한다는 설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인사에 개입했다는 것은 대통령을 움직였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대통령을 객관화시켜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고리 잡는 참모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거죠. 청와대 근무 시 대면보고 한 횟수가 총 여덟 차례밖에 안돼요. 그것도 모두 배석자가 있었어요. 독대는 없었다는 거죠."

-관사에 가서 식사도 했잖습니까.

"그것까지 포함해서입니다. 대통령께 보고도 하루 한차례 6시에 했는데 그것도 국장 두명과 상의해서 온라인으로 보고하는 것이니까 내가 독단적으로 대통령 생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죠.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김대중 정부 초기 장성민 의원의 국정상황실도 굉장했지요. 그 때 그 양반 행동반경이 참 넓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와 비교해서도 이광재 실장의 상황실은 더 막강했던 것 아닙니까.

"그 분은 개인적인 활약이 막강했지요. 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어요. 20명 남짓한 직원 중 파견 나온 공무원이 14명이었어요. 그들이 가지고 온 보고서를 내가 마지막에 조금 고치면 그걸 파견 나온 공무원들이 온라인 상에 올려요. 그리고 그렇게 올린 보고서는 다 정책적인 것과 관련된 얘기들이니까... 그러니까 제가 국정상황실을 나와도 크게 변한 게 없잖아요. 사람들한테 휘둘리는 게 아니니까. 대통령에게 보고드리는 것도 굉장히 절제했어요. 역대 청와대는 수석실과 수석실 사이가 완전히 단절돼 있었어요.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결론을 내는 시스템이었지요. 가장 정보 공유가 활발했던 것이 이번 청와대라고 나는 자부합니다. 그 일을 상황실이 했어요."

-국정상황실장이 경찰정보, 국정원 정보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건 나만 보고받은 게 아니에요. 기자들이 그런 걸 잘 모르고 기사를 쓰는데... 비서실장실, 정무수석실, 민정수석실에도 다 보고가 가요. 우리는 정책정보를 주로 다루고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 청와대 내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상황실이에요, 우리가 가공한 정보는 수석하고 보좌관들에게 다 가는 거예요."

-그런 정보는 각 부처에서 오나요.

"부처에서 올라오는 것도 있고 우리가 발굴하는 것도 있어요.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나중에 문제가 됐다거나 하는 것을 발굴하는 거죠."

-그러면 각 부처는 의무적으로 매일 매일의 상황을 국정상황실에 보고하게 돼 있는 겁니까?

"1차적으로는 정책기획수석실, 정책실장한테 보고가 되는 거죠. 그 중에서 우리가 볼 때 중요하거나 뭐가 빠졌다거나 하는 것을 챙기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전(全) 부처에서 오는 것을 다 할 순 없어요. 그건 정책실에서 하는 것이고... 예컨대 주택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면 그와 관련된 정책정보들을 취합해 보고하고 전파하는 거예요. 임대주택 문제가 너무 소홀히 다뤄지는 것 같아 내가 강력히 이슈화해서 해결한 적도 있어요. 문제의식을 전달하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이광재 국정상황실의 위상은 강력하고도 독특했다. 국정상황실 직원은 모두 27명으로 청와대 내에서는 가장 큰 조직. 순수 상황근무를 위해 파견된 경찰관 5명 외에 재정경제부.기획예산처.산업자원부.중앙인사위.국정홍보처.국무조정실 등의 부이사관급, 서기관급 파견 공무원들이 배치됐다.

국정상황실이 파워풀해진 것은 이 조직에 대통령 지시사항과 부처의 정책진행 상황을 크로스체킹하는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전실장이 중요 정책 사안을 '발굴'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독자적으로 정책 이슈를 찾아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크로스 체킹 과정을 통해 소홀히 다뤄졌거나 누락된 이슈를 되살릴 수 있는 파워를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희정씨와는 또 명암이 엇갈렸군요. 이번 건은 특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기 보다 마음이 아프다는 표현이 정확하지요. 안씨도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이게 숨긴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자"

-안씨와는 언제 어떻게 만났습니까.

"학창시절 운동을 할 때는 인사만 했고 서로 잘 알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서로에 대한 느낌은 좋은 편이었어요. 그는 처음 김덕룡 의원 보좌관을 하다가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철 의원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때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1992년부터 제가 노무현 캠프로 와서 같이 일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해 총선에서 노무현, 이철 두 의원 모두 낙선했기 때문에 그도 별 부담이 없었을 테니까요. 같이 와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한번 만들어보자고 합류를 권유했지요. 93년도에 캠프에 공식적으로 합류했지요. 의기투합한 셈이지요."

-이광재가 바라본 안희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안씨 역할은 살림살이를 포함해 기획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조정 역할도 맡았어요. 조직을 꾸리다 보면 그 안에 갈등이 생기잖습니까. 안씨는 조직 내의 여러 갈등 요소를 조정하는 역할을 참 잘 해냈어요. 팀 안의 여러 가지 실무적, 도덕적 기풍을 만드는 일에 골몰했지요. 서로가 못가진 면을 많이 가졌다고나 할까요.

제가 사업이나 기획을 발제하고 그것이 통과되면 그 이후는 거의 안씨가 도맡아 했지요. 대체로 둘의 공통점은 도전하는 것을 좋아했고 정공법을 선호했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고요. 약간 견해 차이가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갈등은 없었어요. 두 사람이 어울려 재미있게 보냈어요.

대선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선대본부라는 큰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선대기구에서 다 소화하지 못한 부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것이죠. 보조적인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후보의 지지도가 낮다보니 후보직을 박탈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강했고 돈이 궁하다 보니 후보 본인의 카드가 세 번씩이나 정지된 적이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 밖에 없었지요. 후보가 충분히 공부해서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TV 토론 같은데서 말이죠. 또 하나는 결국 홍보, 그 중에서도 선거홍보, TV광고가 있었는데 저는 TV 광고 쪽에 일찍부터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안씨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참모들을 독려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어요. 전반적으로 품성이 아주 좋아요. 조직의 윤활유가 되는 역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성품이지요. 예를 들어 연구소 하나를 차려 사무실을 이사한다. 그러면 안씨가 제일 먼저 나와 짐 꾸리는 일부터 마지막 이사 후 물수건으로 집기를 닦는 일까지 마무리를 했지요. 지난 번 대선 후보등록 때 등록금이 없을 때는 주변 사람들을 불러놓고 카드론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역할을 한 거예요. 후보 등록을 못할 뻔 했잖아요.

2000년 총선 낙선 후 돈이 얼마 있냐. 그러니까. 1천몇백만원이 남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빚을 1-2천 더 얻어서 부산 전역에 플랭카드를 붙이자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입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발주하고 붙이고 하는 일을 다 안희정씨가 했어요. 모두 낙담해서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졌을 때 봉고차에 플래카드를 싣고 밤새도록 매달았습니다. 열정과 헌신성이 굉장히 뛰어난 친구예요. 그런 점을 노대통령도 높이 평가했지요."

강은교 시인 부부가 노대통령에게 추천

-노대통령과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은 겁니까.

"1986년 수배를 피해 충청도에서 막노동을 6개월 했어요. 그 후론 부산으로 와서 부산에서 주물공장 일을 하면서 지낸 일이 있지요. 1987년도에 여러명 모인 자리에 한번 정도 인사한 게 첫 번째 대면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기간 때 의미 있는 인사는 아니었고요. 대통령께서는 기억도 못할 거예요. 제가 보안사 끌려갔다 형을 몇달 살고 풀려난 1988년 부산 동아대 강은교 시인의 남편 임정남씨한테 당시 노무현 의원이 보좌관 할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나봅니다. 두분 모두 다 저의 대학 선배였는데 당시 노의원에게 저를 보좌관으로 추천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 됐습니다."

-그 분 첫 인상이 어땠습니까.

"부산 시내 호텔에서 처음 만났는데 자기는 국회의원을 이렇게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자신에게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그래요. 처음 만난 새파란 후배에게 그렇게 몸을 낮추는 것이 인상적이더라고요. 팀을 짜달라고 했어요. 그때 팀을 짠 사람 중에 운전하던 분은 지금도 청와대에서 운전을 해요. 팀을 짜서 보고를 했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었어요. 그렇게 어렸던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해준 게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처음 국회에 진출한 사람이 첫해에 그토록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뭡니까.

"제가 당시 나이가 24세로 국회 내 최연소보좌관이었고 그 때 팀원들이 다 저보다 선배들이었어요.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회관에 불이 꺼지지 않는 방, 도서관에서 가장 책을 많이 빌려간 방으로 꼽혔지요. 너무 일이 많아 신촌에 여관방을 따로 잡아 일을 했어요. 대통령은 우리에게 법률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해서 아침에 일찍 출근시켜 법률 과외공부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노태우 정부 초기 때인데 여소야대였던 관계로 국회법이 개정돼 청문회, 국정감사가 부활했습니다. 의정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해 말 청문회할 때 노무현 의원의 진가를 봤어요.

처음 세비가 나왔는데 입법 활동 보조수당을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참모들 몫이라는 것이죠. 그런 거 보고 저도 보좌관 월급을 나눠서 팀원들에게 줬어요. 그 때 우리팀이 인원이 정원보다 좀 많았거든요. 국정감사 때 엄청난 준비를 하는 것, 수위 아저씨에게 꼬박꼬박 인사하고 꼭 존대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청문회 준비는 어떻게 했나요.

"당시 노무현 의원은 하나의 질문에 예상 답변을 모든 경우의 수로 만들어 그 각각에 대한 질문을 일일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커다란 전지에 우리가 그걸 도표로 그려줘요. 그러면 그 내용을 이 양반이 통째로 외우는 거예요. 탁월한 사람이다 탄복했어요. 암기력도 탁월하지만 그 전체 맥락을 다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니까 청문회나 국정 감사에서 예리한 질문을 날리는 '스타'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청문회 때 격려전화가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됐었습니다.

청문회 끝나고 저는 그만두려고 했어요. 내가 모시기에는 이 분이 너무 커진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만한 역량이 안된다고 건의를 드린 거죠. 새로운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어요. 1989년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저를 집으로 불러 뒷일을 부탁한다고 하고 충주, 설악산 등지를 떠돌며 한동안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을 놓친 겁니다.

YS가 저하고 임정남 선배를 불렀어요. YS가 노무현 의원 너무 순진하다... 저런 정치인 처음 본다 그랬어요. 저런 정치인 정말 처음 본다 그러더군요. 정치라는 게 그게 아니니까 꼭 만나게 해달라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YS를 만나 다시 국회로 돌아왔어요. 1990년 3당 합당 때도 그랬지요. 그분 처지가 어려웠으니까 떠날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 생각할 때 대통령이 되는 순간 제가 그분 곁을 떠나는 게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어요. 정권의 운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중에 정권이 어려워졌을 때 그 때 정권을 지키는 사람의 역할을 맡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최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로 지역구 버릴 때 全 참모가 반대

-92년 총선 때는 YS라는 벽을 넘지 끝내 넘지 못했지요.

"YS는 1988년 선거 때 노의원 지원 유세에 와서 '총잡이는 서부로 보내고 인권변호사는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그랬어요. 1992년 유세 때 와서는 '허삼수는 참 충직한 군인이다, 내가 크게 쓸 것이다' 그러더군요. 3당합당 때 YS는 사실 정치적 쿠데타를 한 건데 막상 부산에서는 YS를 따라가지 않은 노무현을 '배신자'라고 불렀어요."

-탈당하느냐 마느냐 고민을 좀 했나요? 어떤 조언을 했습니까.

"전혀 고민이 없었어요."

-사전에 3당 합당 사실을 전혀 몰랐나요?

"아뇨 알았어요."

-그랬군요.

"노대통령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매우 본능적인, 육감적인 특성과 논리적이고 체계를 추구하는 특성 말이지요. 위기가 오면 본능적으로 굉장히 강한 사람이 돼요. 1990년 1월20일 3당합당이 이뤄졌는데 1월18일 노무현 의원은 대의원들에게 편지를 써요. 이 상태로 가면 3당 합당이 된다, 그것은 호남을 고립시키는 일이고 정치 도의에도 맞지 않는 일이라는 내용의 편지였지요. 그래서 팜플렛을 만들어 대의원에게 보내려고 했어요. 합당되던 날은 눈이 많이 왔는데 오후에 주문한 인쇄물이 도착해서 막 작업을 하고 있는데 3당합당 소식이 들리더라고요."

-1996년 종로에서의 낙선 후 노대통령의 정치적 장래에 회의감이 들지 않던가요?

"1996년 낙선은 좌절이었어요. 부모님도 이젠 네 살 길을 모색해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돈을 주셨어요. 1억원 가량의 돈을 줄테니 살 길을 모색하라고 말이지요. 진짜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며칠 고심을 하다 배수의 진을 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죠. 종로를 떠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청진동에 소꿉동무라는 카페를 내게 됐죠.

68평짜리 카페였는데 꽤 규모가 컸지요. 다른 분이 출자를 해서 효자동에도 비슷한 카페를 냈고 대통령도 종로3가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명륜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 때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배수의 진을 치고 가게를 냈는데 하늘이 도와줘요. 1998년 보궐선거가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00년 총선 때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종로구는 장난이 아닌 동네예요. 여기가 전현직 국회의원 120명이 사는 동네입니다. 교수가 약 3,000여명 살아요. 막대한 상권을 가지고 있고 하루 유동인구가 수백만명입니다. 정치 1번지가 그냥 말만 그런 게 아니고 명실상부한 정치 1번지예요. 화전민 생활 하다 문전 옥답의 주인이 됐는데 다시 자갈밭으로 가자는 거예요. 글쎄 이 분이 말이죠. 정말 돌아버리는 거죠. 가면 진다 이거... 그런 승패의 측면도 있었지만 노무현 의원이 많은 인맥과 안정적 지반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종로 지역구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모든 참모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 말씀이 전국정당 구축이 중요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제2의 도시에 의원 한명 없는 정당은 장래가 없다는 거예요. 며칠 후 우리를 불러 나의 결단이다, 따라달라. 재론하지 말라, 그러더군요."

택시운전사 30-40명 만나고 중대 사안 결정

-DJ와의 교감설이 있었잖아요.

"그런 것 없었어요. 나중에 조세형 대표에게 그런 결심을 통보하고 조 대표가 DJ에게 보고했대요. 아니 요즘 그런 사람도 다 있는가 하더래요. "

-패배를 예감했나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선거라고 보았지요. 낙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선거였던 거죠.. 그래도 군말 않고 내려가서 선거운동 했어요. 결과는 예상보다 더 참담했습니다.

-타고난 기획가라고 하는데 그런 칭호를 얻게 된 비결이 뭡니까.

"저는 신문을 안봐요."

-신문을 안봐도 정보가 들어오니까 굳이 볼 필요가 없겠죠.

"아니 원래부터 잘 안봐요."

-대통령 참모가 신문 안보면 제대로 일 할 수 있나요?

"하긴 이기명 선생이 매일 모니터를 해줘요. 아침 6시가 좀 넘으면 전화를 해줘요... 오늘 이런 저런 기사가 났다고요."

-신문을 안보는 것 하고 기획을 잘 하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그게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으로 작용하는 건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신문에 매몰되다 보면 두뇌가 좀 테크니컬한 쪽으로만 발달하게 되거든요. 저는 주말에 책을 10권쯤 골라 사요. 그리고 그 책을 요약해주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부탁해서 요약된 책을 봅니다. 책에도 유행이 있고 트렌드가 있잖습니까. 사람들의 심리의 트렌드가 보이는 거예요.

그 중에서 의미가 있는 책은 노대통령에게 보내드리지요. 그런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큰 줄기와 맥을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선대위 조직은 거대하긴 하지만 정신 없이 돌아가는 조직이라서 못보는 것이 있어요. 그럴 때... 또 뭔가 큰 결단이 필요할 때 제가 준비를 해서 택시를 하루 30-40번쯤 탑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뭔지를 물어요. 택시 기사들한테... 미리 가설을 세워놓고 택시를 타는 거죠. 저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3억분의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나온 게 사람이라서 개개인마다 굉장한 에너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택시를 서른번만 타보면 아 어디로 가야겠구나 감이 잡히는 거죠. 여러 권역으로 나누어서, 잘 사는 동네 못사는 동네 나눠서 말이지요.

"5억짜리 집 검찰에서 내사 했다"

-집이 호화주택이라는 언론보도가 있었습니다. 네 식구 사는데 그렇게 큰 집이 필요한가요? 민감한 시기에 이사를 하고 또 그 집 산 돈의 출처가 석연치 않다고 하는데요.

"검찰에서 조사를 다 한 것 같더라고요. 그집 5억짜리 집이예요. 5억 5백만원. 판 사람들 조사도 다 했고 저에 대한 자료도 내사를 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아무리 조사해도 뭐가 나올 게 없습니다. 아내는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일을 했어요. 신문사에서 일하다 대학에서 교직원을 했습니다. 저도 비록 적지만 1988년부터 지금까지 월급을 끊어진 적이 없어요. 거기다 가게를 했지요. 처가로부터 도움도 좀 받았어요. 내 재산이 그 집값보다 훨씬 많아요."

-그래도 절제하고 내핍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 집에 이사오기 전에 구기동의 방 세칸 짜리 집에 살았는데 이제 둘째가 자기 방이 필요한 시점이 됐어요. 노대통령이 후보가 되고 나니까 집을 옮길 필요가 생기더라고요. 우리 집이 수위실 바로 앞이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 노출이 많이 되고... 게다가 우리집 책이 수천권이에요. 제가 책을 좋아하고 아내도 출판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거실부터 해서 책으로 넘쳐나는 거예요. 좀 큰 서재가 필요했어요. 그런데다 그 집을 아주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마침 생긴 거죠. 이왕 하는 김에 빨리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앞으로 특검에서도 아주 강하게 조사할 텐데요.

"실사 다 했어요. 보라매 공원 옆 분양 받은 아파트 팔고 하니까 지금 이 집 값을 훨씬 넘는 돈이 있었어요. 검찰에서 다 내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중수부에서 어설프게 소환을 했겠어요?"

"노대통령, 자유주의자면서 실용주의자"

-노대통령은 사상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국민은 최근 그의 여러 가지 정책을 보면서 상당히 헛갈린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 분은 자유주의자면서 실용주의자이지요. 이념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죠. 그는 소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믿는 사람입니다. 노대통령의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장난감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는 결국 성립하기 힘든 제도라는 것을 믿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따님이 아주 어렸을 때 이사를 했는데 헌 인형을 아주 완강하게 버리지 않으려 하더래요. 이사할 때 헌 물건을 추려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상대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하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각자에겐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단 말이죠. 그것을 획일화할 수 없다고 대통령은 믿고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은 자신의 본능적 에너지를 갖고 사는데 이념 같은 것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신봉하는 것이죠."

-대통령이 자식들을 가르치고 대하는 풍모는 어떻습니까.

"아이들 데리고 캠핑을 많이 다녔죠. 제주도에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야외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답니다. 어릴 때 아이들한테 항상 했던 교육이 있는데 굉장히 간단한 겁니다. '신발을 똑바로 놓아라'에요. 그리고 화장실 세면대를 쓰고 나면 반드시 깨끗이 할 것.... 그겁니다. 아이들이 좀 커서 술을 먹고 2시에 들어오건 3시에 들어오건 상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족들과 저녁 약속 시간을 술 먹느라 지키지 못하면 그건 굉장히 혼나죠. 자기를 절제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 공부는 결국 혼자 하는 거다. 이런 것입니다."

대통령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이 계속됐다. 그는 대통령을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한 점을 존경합니다. 해양부장관 시절 보니까 지갑에 카드를 2개 넣고 다녀요. 하나는 법인카드고 하나는 개인카드입니다. 그런데 우리하고 밥 먹을 때는 꼭 개인 카드를 써요. 해양부 업무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임기 초 차관 인사를 할 때 어떤 부처의 기획관리실장이 차관 물망에 올랐어요. 그런데 인사위 실무 라인에서 이 사람은 차관을 시키면 안된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소리 안하고 그 사람을 배제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인사위 사람들, 비서실 사람들 만나 '사실은 내가 그 사람과 10년 이상 인연을 맺었고 신세도 여러번 졌다' 고 해요. 대통령이 그러는 것을 보면서 누가 인사청탁을 할 수 있겠어요?"

"노무현은 근본주의자"

-노대통령은 제가 보기에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어요. 원칙을 중시하면서 또 어떤 때는 아주 파격적으로 원칙을 깨버리잖아요.

"본질적으로 그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원칙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쓰는 사람이죠. 깨버리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 관성이나 타성, 고정관념이죠.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학습욕이 대단해요.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때 국회에서는 처음으로 참모들에게 애플 컴퓨터를 사줬어요. 컴퓨터가 굉장히 비쌌을 때 말이죠. 전자수첩도 가장 먼저 사용했어요. 동료 의원들이 '체신머리 없이 전자수첩을 쓴다'고 빈정댔죠. 사무실에 랜을 설치해 지식과 정보를 공유케 한 것도 우리 사무실이 처음이에요. 지식공유 시스템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어요. 설계도를 본인이 직접 그리는 데만도 A4 용지 수천장을 썼을 겁니다. 대한민국은 매사가 즉흥적이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발로가 바로 이 컴퓨터 프로그램의 개발입니다. 지금 청와대나 정부 안에서도 시스템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굉장히 피곤하고 고통스런 일이죠. 그런데 일단 만들어놓으면 편해집니다. 5년쯤 후면 굉장히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프로그램 개발할 때가 1993년도였는데 저와 안희정씨가 그 일에 좀 소극적이었거든요. 두 사람을 부르더니 '너희는 개혁의 저항세력'이라며 엄청나게 역정을 낸 적이 있지요."

-노대통령은 소위 '특권'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일각에서는 그것을 '비주류 콤플렉스'로 부르기도 합니다.

"특권을 혐오하는 것을 콤플렉스로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이상한 것 아닌가요. 예컨대 이런 겁니다. 우리는 흔히 그러잖아요. 어떤 사람과 선약이 있는데 그보다 지위가 높거나 더 중요한 사람이 만나자고 하면 선약을 깨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노대통령은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약속을 중요시 하죠.

의원 시절 전남 함평에서 강연회 연사로 초청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날 독감이 걸려 노의원은 거의 초죽음 상태였죠. 우리는 다 말렸는데 끝내 가자고 해서 갔어요. 큰 행사도 아니었어요. 80명 정도 모이는 그 강연회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탈진해서 바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클린턴과 DJ와 YS의 장점들을 노대통령이 어떻게 갖추거나 흡수하고 있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대화를 좋아하고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애호하며 습득한 지식을 바로 응용하는 능력은 클린턴을 닮았고 난국을 타개하는 동물적인 본능과 에너지는 YS를 닮았으며 논리적 일관성과 지적 능력은 DJ를 닮았다는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면 노대통령이야말로 최고의 통치자임이 분명한데 노대통령이 처한 현실은 왜 지금처럼 각박하고 답답한 것일까. 이 궁금한 질문을 미처 하기도 전에 이 전실장은 노대통령의 집에 비치된 공구 이야기를 꺼냈다.

"노대통령 집에 가보면요, 모든 종류의 공구가 다 비치돼 있어요."

-공구라구요?

"네 공구요. 드라이버 세트 같은 거 말예요."

-그걸로 뭘 하시는데요.

"고장난 게 있으면 다 자기 손으로 고치는 거죠. 원리를 탐구하기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 분은 근본주의자죠."

근본주의자라면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생각나는 요즘 아닌가. 그런데 그는 근본주의자의 뜻을 '원칙을 세우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사람'으로 풀이했다.

최상의 통치자, 그러나 답답한 정국

"낚시를 한다, 그러면 낚시에 관한 책을 모두 사요. 그것을 다 읽은 다음에 낚시를 가는 겁니다. 컴퓨터나 골프도 마찬가지죠. 컴퓨터 책을 일단 사서 그 책을 통째로 다 외웁니다. 그래서 아들과 둘이 용산에 가서 컴퓨터를 삽니다. 집에 가지고 와서는 컴퓨터를 뜯습니다. 그래서 CPU가 뭐고 사운드카드가 뭐고 하드가 뭔지를 알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참 다양한 재능과 훌륭한 성품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정국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겁니까.

"지금 상황이 어렵지요. 집권 1년 안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은 다 겪었다고 봐요. 앞으로 4년은 잘될 것이란 확신과 예감이 있어요. 전통적인 정권의 궤적과는 달리 가고 있단 말이죠. 시간이 지나면 안정화되리라고 봅니다. 클린턴 정권도 집권 8개월 때 지지도가 30%까지 떨어졌습니다. 엄청난 스캔들에도 불과하고 아마 다시 출마할 수만 있었으면 또 당선됐을 거에요."

-천정배 의원이 이 전 실장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지요. 국정 난맥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어습니다.

"저도 대통령에게 필요하겠지만 천의원도 대통령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제가 버티게 되면 대통령이 천의원을 잃게 되잖아요. 대통령께는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면 저는 외국으로 떠납니다, 안돌아옵니다...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역정을 내셨지만 나중엔 제 말에 동의하시더군요."

-상황실장 사직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천의원이 제기한 국정난맥상의 중심에 이전 실장이 있다는 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지적에 얼마나 동의합니까.

"책임이 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가까이 모셨던 사람으로서 대통령 스스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상황이 왔는데 책임이 없을 수 없지요. 유능한 사람이 와서 일을 해주길 정말 원합니다. 천의원의 문제제기가 전부는 맞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가지는 맞는 말 아니었겠나 생각을 하는 거죠. 제가 자리를 비키는 게 맞습니다."

"특검에 눈치보며 출마 저울질 않겠다"

-권력이라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집권 후 그런 문제를 생각할 기회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권력은 즐거운 겁니까 괴로운 겁니까.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칼날 위에 있는 꿀을 빨아먹는 일이란 말이 있지요. 저는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내면의 결심은 오래 전부터 있었어요. 제가 사람이나 만나러 돌아다니고 꿀물이나 추구했다면 저는 이미 인수위 시절에 날라갔을 겁니다. 몇 개월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제가 절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마는 하는 겁니까.

"아직 결정 내린 것 없습니다. 지금까지 정치권에 있었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출마 문제 이런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이 우선이겠지요. 앞으로 특검 등의 유동적인 사정에 끌려다니며 눈치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체적인 선택을 해야겠지요."

-사표를 내고 오대산을 갔었죠.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금당 계곡 옆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조그만 암자에 갔었는데 비구니 스님 한분이 혼자 수행을 하고 있어요. 제가 물었죠. 무섭지 않습니까. 안 무섭습니다. 외롭지 않습니까.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 대답을 하시더니 '외로움의 극치를 고독이라 표현하는데 속가에 나가 살다보면 고독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게 돼' 그러시는 거에요. 그때 내 마음이 참 편해지더라고요.

상원사 주지스님과 산행을 했는데 스님이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상원사에 서대사라는 암자가 있는데 그 옆에 우통수라는 샘이 있대요. 이 우통수는 남한강의 발원지입니다. 이 우통수물은 비중이 높은 물이라 깊숙이 가라앉아 한강의 중심을 흐른다는 거에요. 우통수가 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역사와 현실에서 동시에 승자가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하겠지만 현실에서 실패하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정권을 지키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요.

"앞으로 또 위기와 고비가 닥칠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퇴임 후에도 젊은 전직 대통령을 끝까지 잘 모시려고 합니다. 스물 네 살 나이에 제가 한 남자에게 순정을 바쳤는데 그 분과 끝까지 가는 거죠. 제가 고향에 땅도 좀 있고 해서 퇴임 후 혹시 아름다운 땅 평창에 사신다면 오랫동안 잘 모시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이광재 성장기 고백

나를 깨우친 보안사 고문 수사관의 한마디

"광재야, 공부는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냐?"

나는 1965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1남6녀, 위로 누님 한분, 그리고 아래로 다섯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니 나는 여자 형제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나의 조부는 5남매 중의 막내로 증조부로부터 물려받았던 재산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조부의 별명은 '곰'이었다고 한다. 힘이 장사여서 단오날 씨름대회 나가서 황소도 받아온 분이었고 재산을 작게 물려줬다고 해서 형들을 절대 원망하지 않은 우직한 분이었다.

조모는 아끼기 위해 점심을 먹지 않는 분이었다고 한다. 증조부 때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조부의 형제들은 대부분 서울에 유학을 했고 이 분들이 모두 좌익이 됐던 것 같다. 그 점 때문에 가슴 아팠던 기억이 많다. 언젠가 6촌 형 집에 가봤더니 그 형이 울면서 책을 불태우고 있었다. 신원조회에 걸려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작은 아버지는 독일 탄광 광부를 지원했는데 그것도 신원조회에 걸려 좌절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를 했는데 낯선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서성거렸던 생각도 난다. 그 때는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라 형사들이 우리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왔던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릴 때 꿈이 법관이었는데 우리집 사람들은 그런 직업을 애당초부터 꿈꿔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살림은 참으로 어려웠다. 아버님은 공무원이 되고 싶었는데 연좌제에 걸려 운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당시 군수의 딸 영은이라는 아이의 젖을 먹여주고 아버님이 공무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참 가난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때 문화제가 열려 학교에서 가장 행열을 할 때 나는 늘 나졸 역할을 맡았다. 그 뒤 어머니가 두부공장을 하고 나중에 방앗간을 하면서 가정 형편이 나아졌던 것 같다. 아버님은 공무원을 하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현금'을 쥘 수 있는 방앗간을 했으니 시골에서 우리는 부자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 뒤 내 동생이 가장 행렬을 할 때 늘 왕비의 역을 맡았던 것을 보면 우리가 부자가 된 것은 확실했다.

어머니의 생활력과 방앗간의 힘

우리 7남매가 모두 서울의 소위 명문대학을 나와(단 한명도 재수를 하지 않았다) 대체로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어머니의 경이로운 생활력, 그 분이 운영하셨던 방앗간의 힘이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 조부모님에게 부지런함의 소중함을 배웠다. 조부님이 새벽에 일어나 논물을 대고 들어오시기 전까지 나는 집밖 신작로까지 마당을 쓸어야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는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어머니가 두부집을 하셨는데 나는 우리 동네의 유지들 집에 순두부 배달을 하고서야 아침을 먹고 등교할 수 있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교훈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확실하게 교육을 받은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부모님은 논을 팔아 지금의 목동 근처에 외삼촌 명의로 집을 한 채 샀다. 그 집값이 조금 올라 2학년 때 내 명의로 집을 한 채 마련한 것이 내가 성인이 돼서 비교적 안정된 경제생활을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러나 그 때 이후 나는 한번도 부모님에게 돈을 타서 쓴 적이 없다. 나는 항상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썼다. 근면한 성품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아버님과 초등 학교 시절 거의 매일 낚시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내 고향 평창은 남한강의 발원지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미국 몬타나의 강 못지 않게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곳이다. 나는 그 강(강이라 할지 개울이라 할지)에서 아버님과 견지 낚시를 했다. 아버님은 내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이 돼라!"

훌륭한 사람이라니. 초등학생에게 그 말은 너무도 추상적인 교훈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깊이 새기고 살았다. '훌륭한 사람이 될 것!'

중학교 때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원주중학교로 전학을 한 것이다. 원주는 당시 재야세력의 메카였다.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님이 계셨고 최일 신부가 계셨다. 장일순 선생은 우리나라 생명사상의 원조격인 분으로 당시 원주 봉산동에 동생 장화순 선생과 함께 살고 계셨다. 장화순 선생은 진광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셨고 나는 그 선생님의 아들과 친구가 됐다.

장화순 선생 집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적어도 1만권은 족히 돼 보였다. 그래서 김지하, 박경리 같은 분들을 나는 중학 시절부터 뵐 수가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신년 메시지의 녹음 테이프를 조심조심 들었던 기억도 났다. 그 때 추기경의 메시지는 반유신 선언이나 다름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집에서 책을 한권 빌려 밤늦게까지 읽곤 했다. 나의 지적인 역량은 그 친구를 만나면서 팽창했고 그 친구와의 만남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인연이었고 그는 내 인생의 지평을 한껏 넓혀줬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기껏해야 대학을 마치고 고시공부에나 전념하는 평범한 사람이 돼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 항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꽤 심각한 고민을 했다. 광주로 가서 시민들과 합세할까를 고민한 것이다. 끝내 결행하지는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상당 기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고3 2학기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는 친구 2명과 함께 광주, 목포를 거쳐 제주까지 무전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망월동 민주투사 묘역에 참배하고 나는 여기에 묻힌 분들을 잊지 않겠다는 서약을 굳게 했다. 다시는 여기 광주를 배신하지 않고 살겠다고...

장일순과 '일가를 이루는 삶'

장일순 선생의 삶을 지켜보며 나는 '일가(一家)를 이루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능력이 부족하면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는 필부가 될 것이고 더 성장한다면 또 다른 의미의 일가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나는 해운대 바닷가에서 아내에게 청혼하면서도 '일가를 이루겠다'는 공약을 했다.

장일순 선생은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이 찾아오면 좋은 글을 써서 봉투에 담아 주면서 그 사람을 위로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그 풍모에 반했고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 감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일관되게 꼭 연세대에 가겠다고 생각했다. 연고전을 봤을 때 연대의 유니폼이나 그 모든 것이 제일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죽자사자 공부만 하지는 않았다. '연세대는 갈 수 있겠지' 라는 약간의 오만함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한달에 한두번은 꼭 춘천으로 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춘천 명동의 대원 닭갈비집의 두껍게 썬 고구마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집에서 1차를 하고 강원대 근처 술집에서 2차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날 술 먹고 일요일 날 돌아오는 여정이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 일단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여동생들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꼭 술을 사줬다.

고백하건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탄광지대로 전학을 갔는데 막장 광부들의 당시 월급이 10만원이었다. 도시 화이트 칼라 월급의 두배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도시는 흥청거렸지만 결손 가정이 많았다. 결손가정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담배를 배운다. 어떻게 할까. 담배를 피우며 이들과 친해질까, 아니면 '범생'으로 지내며 고독하게 지낼까.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여동생에게도 담배를 가르치다 아버님에게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원주로 전학올 때까지 흡연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대학 재학 중 당시 한양 로타리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생으로서는 상당히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당시 이 클럽의 회장은 김광균 시인이었다. 부회장이 윤승두 한국은행 부총재였다. 나머지 150명 회원도 모두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플라자 호텔에 매주 월요일 모여 강의를 듣고 현장에서 모금을 해서 봉사활동 기금으로 썼다. 나는 회장의 비서 비슷한 일을 하고 주보와 연보를 만들며 꽤 큰 돈을 벌었다.

나는 이 때 성공하는 사람들한테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특히 윤승두 당시 한은 부총재의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내가 소위 보수적인 엘리트들에 대해 열린 마인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당시 그 분들의 꽉찬 인생을 보고나서였을 것이다.

그 분들은 나를 참 좋아해서 생활비를 포함 학비 전액을 부담하는 미국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호의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이미 운동권에 깊숙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4학년 때 내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분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나는 운동권 시절 후배나 동료의 인생을 강요하는 방식의 운동에 대해 반대했다. 후배에게 시위 시간을 알려주긴 했지만 가고 안가고는 스스로의 판단에 맡겼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갈등이 심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학교 안에 양 세력이 섞인 '주당클럽'을 만들었다. 모여 술을 마시며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모임은 지금도 이어져 언제라도 멤버의 절반 이상이 모이는 훌륭한 친목 모임이 됐다. 얼마 전 20주년 기념식 때는 부부동반에 아이들까지 모여 여행을 가기도 했다.

나는 진보든 보수든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의 미덕은 안정성의 추구와 함께 지도자를 추대하는 능력이라 본다. 진보의 힘은 비판능력과 절제된 삶이다. 두 세력 사이에 이제 소모적인 싸움은 불필요하다.

"인생은 짧고 고문은 길다"

그렇다고 내가 학생운동을 느슨하게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게으른 후배들, 공부 안하는 후배들을 혹독하게 다뤘다. 교조적인 성향의 후배, 그저 책 10권쯤 읽고 운동권입네 하는 후배들은 내게 걸리면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나는 그때도 독서량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서로 다른 관점의 4-5권의 책을 내주고 토론을 시켰다. 선택은 자유지만 일단 선택을 하면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못하는 후배들을 나는 참지 못했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서양 고전음악을 열심히 들었는데 이것을 두고 선배들은 나를 리버럴이라 부르며 비난하기도 했다. 좋다. 리버럴이라고 치자. 그러나 당시의 나만큼 열심히 운동을 지속했던 학생들도 별로 없었다고 자부한다.

4학년 때인 1987년 여름 나는 부산의 주물공장에서 일하며 수배를 피하고 있다가 부산 보안사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서울 남영동 분실에서 20여일 간 조사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조사를 받던 책상 한 귀퉁이에 누군가 작게 "인생은 짧고 고문은 길다"라는 글귀를 써놓은 것을 봤다. 기분이 참 묘했다. 20여일 간의 혹독한 조사가 끝나고 나를 담당했던 수사관이 탕수육 안주에 소주를 사주며 말했다.

"광재야, 내 아들이 고3인데.... 공부는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냐?"

이 수사관도 '파쇼의 앞잡이'에 앞서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버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분노가 이 아버지의 소박한 질문 앞에 무력화되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결국 우리는, 대한민국 안의 모든 사람들은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남영동에서 나는 그 점을 깨달았다.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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