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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김인후의 「실천도학」 높이 솟은 필암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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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물의 이치를 바로 깨닫고 자기의 글을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큰 일이다. 하물며 그 위에 학문으로 익힌 바를 몸으로 실천하여 후세의 사표가 되기란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백두대간이 동으로 흘러 조선조 전기에 퇴계 이황을 낳았다면 서로 뻗어 하서 김인후를 낳았으니 김인후로부터 호남의 유맥은 발원되어 대하를 이룬다.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4시간쯤 가면 광주 바로 못 미처에 장성인터체인지가 나온다. 장성은 산수가 좋기로 이름이 높고 숱한 고학·대문장들을 낳아 「글이 장성만 못하다(문부여장성)」는 말이 있으며 일찍이 조종생이 이곳을 두고 「산 돌고 물 굽으니 하늘이 절로 솟았다(산회수곡자부성)」고 노래하기도 했다.
장성에서 황룡천 물줄기를 타고 서쪽으로 6㎞쯤 가면 삭은 홍살문(홍전문) 이 비스듬히 고개를 젖히고 인사받고, 빛 바랜 단청이 오히려 문향을 풍기는 확연루(확연루)의 높은 다락이 송시열의 힘찬 글씨로 위엄을 보이는 필암서원(외성군황룡면필암리) 이 있다.
필암서원은 선조23년(1590년) 하서 김인후의 드높은 학문과 출처(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정신을 받드는 제자들이 그의 31주기 때 장성읍에 세웠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옮겨지었다가 현종3년 필암서원으로 사액(임금이 현판을 내림)된다.

<장성의 신동이라>
김인후가 출생한 맥호(황룡면맥호리)에 붓바위(필암)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김인후는 이곳에서 삼봉벼슬의 영과 옥천조씨 사이에서 중종5년(l510년)에 태어난다. 본관은 울산이며 호는 하서, 또는 담재(담재) 다. 어려서부터 미목이 수려하고 재주가 남달라 신동이라 불렸다.
여섯살 때 「높고 낮은 것은 땅의 모양 때문이요, 이르고 늦은 것은 시간이 주는 것이다(고저수지세조만자천시)」라는 시를 써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여덟살 때는 조광조의 삼촌인 조원기가 전라감사로 와 김인후를 떠보고자 「전주에 묵으며 이원경치에 배를 불렸네(신숙완산포리원지풍경)」하고 읊으니 김인후가 「전주에 머물면서 매정의 달빛을 물렸다(체류풍패학매정지월광)」고 냉큼 받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풍패(풍패) 는 한나라를 일으킨 곳인데 조선왕조를 일으킨 곳으로 전주를 빗대어 쓴 것이다.
열살 때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안국은 김인후를 만나보고는 「나의 어린 벗이다. 3대에 하나 있을 인물이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는 그 자리에서 김안국은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해 12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이 화를 입게 되자 학문적으로 이론을 같이하던 김안국에게도 불똥이 튄다. 그러나 김안국은 전라도에 있었던 때문에 파직되는 것으로 그친다.
13세 때 소학을 배우면서 시경도 읽었는데 이무렵 호남가단을 일으킨 사앙정 송순을 찾아다니며 글을 묻고 시를 배우게 된다. 18세에는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된 최상두에게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미 학문과 인품이 완성된 김인후를 보고 최상두는 그를 「가을물 얼음항아리(추수빙호)」에 비유하기도 했다.
19세에 상경,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 등과 수학했고 22세에 사마시에 급제할 때는 서경덕·성운·백인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기묘사화 이후 유생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나 이황과는 뜻이 맞아 경학을 자주 토론했는데 「퇴계와 교분을 맺은 사람은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퇴계언행록」에 쓰여있을 정도다.

<세자의 스승되어>
중종38년(1543년) 스승인 김안국이 죽자 복을 입고 그해 4월 홍문관박사겸 세자시강원세서로 세자의 스승이 되어 세자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주자대전과 묵죽을 하사받기도 했는데 묵죽에 붙여 화답시를 쓴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의 정교함이 이를 데 없구나
굳게 맺어진 뜻 이 안에 들어있네
비로소 성신의 조화로움을 깨닫느니
하늘과 땅이 하나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
(근지절섭진정미 석지정신재범위 시각성신양조화 일 단천지부능위)
6월에는 기묘사화에 희생된 큰 선비들의 신원(신원-억울함을 씻어줌) 하는 상소를 올린다. 「기묘사화는 조야의 선비들이 그 무고한 회생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본심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님을 밝히시고 위로는 전하께서 의심하는 생각을 풀으시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이 저승에서 원한을 씻도록 하소서」하니, 중종도 이 글을 읽고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1545년 즉위한 인종이 스승 김인후의 뜻을 받아들여 기묘사화의 조광조 등이 신원된다. 옥과현감으로 내려가 있던 김인후는 그해 7월 인종이 승하했다는 부음을 듣고 산 속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한다. 명종이 즉위하고 이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내놓고는 고향인 이곳 장성에 돌아와 그의 학문을 완성한다. 그러면서도 7월 초하루인종의 제삿날에는 산에 들어가 곡을 하며 추모의 정을 쏟았다.
송강 정철은 「김인후를 그리며(회하서)」라는 시로 그를 기린다.
동방에 출처를 아는 이가 없더니
오직 한 분 선생 뿐이셨네
해마다 7월 초하루면
산속에 들어가 통곡 하셨네
(동방무출처 독유담재옹, 연년칠월일, 통곡만산중)
김인후에서 글공부를 한 송강은 누구보다도 그를 숭상하여 「그의 출처대절은 퇴계도 미칠 수 없다」고 학문과 더불어 그의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결하고 청명한 몸가짐에 머리를 숙인다.
그는 유학의 근본인 공자에 충실하였고 시를 배우지 않고는 성인의 가르침을 깨칠 수 없다고 시경을 추장하기도 하였다.

<벼슬도 마다하고>
성균관 전적, 공조정랑, 홍문관 지리, 성균관 직강 등 잇따라 벼슬이 내려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자 명종은 「병이 있다고 사양하니 몹시 서운하다」고 거듭 명을 내렸지만 그는 끝내 고사하였다.
기묘사화의 선비 김정의 시집에 바친 그의 시가 당시의 심정을 말해준다.
오기는 어디서 와서
가기는 어디로 가는가
가고 오는 것 자취가 없는데
백년 뒤를 걱정하는구나
(내종하처내 거향하처거 거내무정종 유유백년계)
어려서부터 일찍 눈뜬 정주학을 천착하여 「주역관상편」과 「서용사천도」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유실되어 그의 학문적 업적을 헤아릴 수 없음이 안타깝다.
다만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등과 많은 경학을 논하여 저 유명한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사칠리기왕복서」의 논쟁에서 기대승은 김인후의 이론을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 이황도 말년에 김인후의 글을 보고 그의 도가 깊음을 찬탄했다고도 한다.
송시열이 쓴 김인후의 신도비명에는 「국조의 인물에 도학·절의·문장을 겸하여 가진 분이 김인후 선생이시다…. 서경덕의 학설에는 참선가의 깨달음을 주장하는 지름길로 가는 것을 걱정하였고 이항의 학설에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혼동을 지적했고…. 이황의 사단은 이약이요, 칠정은 기약이라는 설에 기대승이 회의하여 선생에게 묻고 논변하였으니…」의 글귀로 미루어 저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등과 맞서는 고학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토록 임억령·이황·양산보·임형수·백광홍·기대승·고경명·정철 등과 교유하면서 경학을 논하고 시를 지었는데 그가 소쇄원(소쇄원 양산보)에게 준 시만 해도 20편이 넘는다. 한편 면앙정 송순의 문하에서도 배운 까닭에 「사앙정삼십영」과 양산보의 정원인 소쇄원을 읊은 「소쇄원사십팔영」을 지었는데 그 웅휘찬란한 문장의 오묘함을 옮기지 못함이 아쉽다.

<글과 행동이 하나>
그의 사상은 성과 경을 중심으로 도학을 실천함에 있었다. 그는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꼿꼿이 세워 글과 행동을 하나되게 하였다. 명종15년(1560년) 3월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면서 「내 죽은 후에 을사년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봐도 그의 출처가 얼마나 엄중했는가를 읽게 한다.
「선생님의 출처의 오롯하심을 말씀하는 것조차 부질없사오나 해동전년에 오직 우리 선생님 한 분 뿐입니다」고 정철은 제문에 쓰고 있다.
필암서원은 사적242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우동사·전사청·신문·경장각·곽연루·장서각 등이 있는데 장서각에 보관된 문헌들은 보물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인후와 사위 양자징을 배향한 필암서원을 나와 산을 돌아서면 그의 무덤이 있고 아래에는 송시열이 비문을 쓴 신도비가 비바람에 깎여 서있는데 그 옆으로는 1983년 신도비를 모각하여 새로 세운 비가 나란치 있다.
저토록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마지않던 출처대절의 거유이며 호남의 유종인 김인후의 시문집 『하서집』23권 8책이 전해져오는데 한시 1백20수가 실려있다.
굴원의 『이소경(이소경)』을 읽고 쓴 5언절구가 가슴을 친다.
청풍강에 초혼제도 못 지냈구나
밝은 해는 어느 때 가 원혼을 비추려나
숨어사는 이에 세상 소식도 끊겼는데
석양에 눈물 뿌리니 하늘과 땅도 우는구나.

<사진=조용철기자>

<필암서원> 하서선생
1
이 빠진 바람이
확연루의 다락에 올라
허리굽은 홍살문을 내다보고 있다
똑바로 서서 오는 이를 맞아야겠는데
나이가 드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도 귀도 침침하다
몸이 마음같지 않으니
상감의 부름을 어찌 받으랴
세상 일 산으로 닫고 앉아
머리 속의 어둠이나 씻어야겠다
2
오늘은 시가 풀리지 않는다
소쇄원의 앞뜰에 흐르는
물소리라도 떠와야겠다내 온 길을 모르니
돌아갈 길을 어찌 알까 보냐
산속 깊이 내 울음을 묻어도
저 황룡전은 듣지를 못하는구나
하늘이 있어 땅도 있는 것
묵죽에 배인 슬픔이
한 줄 시를 가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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