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불행한 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한 사람의 환자가 A치과에 갔더니 그곳의 치과의사는 치아를 뽑지 않으면 달리 치료방법이 없을 것이라 했고, 똑같은 환자가 B치과에 갔더니 아직은 뽑지 말고 치주 치료·근관 치료(신경치료)를 해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보자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환자는 두 치과의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 대학병원을 찾게 되어 어떤 판결(?)을 요구하는 일을 가끔 당하게 된다. 사실 그때만큼 필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경우도 없을 것 같다.
누구의 치료계획이 올바른 것인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어떤 치료 계획이든 그 의사 나름대로의 자유스런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A치과의사의 경우 자기의 소견으론 발치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B의사는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보존적 치료 술을 행함으로써 치아를 더 사용할 수 있도록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두 사람 모두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치과의사가 틀림없고 보면 두 가지 틀린 치료계획의 잘잘못을 가려내는 일은 나로서는 잔인한 판결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의사의 치료 능력은 의사마다 모두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치료의 광범위한 능력을 갖춘 의사는 좋은 의사라고 말할 수 있어도 치료 능력이 부족한 의사를 나쁜 의사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모든 의사들이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하고 절대적인 치료는 무리한 요구인지는 모르나 가능하면 완벽하고 절대적인 치료에 접근하려는 노력과 연마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뽑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었던 의사와 뽑지 않고 치료해 보려고 시도했던 의사의 차이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뽑힌 환자는 불행한 환자고 뽑히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환자는 다행한 환자라 할 수 있다. 환자의 행·불행은 어찌 보면 선택에 달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만나 맺어지는 결혼의 인연과 같은 것인가 보다. 최상묵 <서울대 치료병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