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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문물 정비한 '동국문헌비고' 편찬은 문화국가 위상 세우기 위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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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학 연구단체인 진단학회(震檀學會.회장 정만조)가 1973년부터 매년 실시해온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이 올해로 35회를 맞는다. 제1회 때 '삼국유사'를 테마로 연구결과를 발표한 이래, 해마다 우리 고전 하나씩을 선택해 집중 조명해 왔다. 11일 오후 1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검토될 올해의 고전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다.

'동국문헌비고'는 조선 영조 때인 1770년 만들어졌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고대 이래의 각종 제도와 문물을 종합 정리한 책이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편찬 의도 등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 대개 당시 유행했던 백과사전식 문헌 정도로 알려졌을 뿐이다.

단국대 김문식(45.사학과)교수가 이번 심포지엄에서 '동국문헌비고'의 성격을 본격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김 교수는 "'동국문헌비고' 편찬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당시의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기 위해 영조 임금의 주도 아래 행한 전국가적 사업"이라고 정의했다.

김 교수는 "유교식 예제(禮制)를 탄생시킨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후 '삼통(三通)'혹은 '십통(十通)'이라 하여 수많은 전장서(典章書)들이 편찬됐는데, 조선에서는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전장 제도를 전반적으로 정리한 서적은 없었다"며 "이는 중화(中華) 문물을 계승한 문화국가임을 자부하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큰 약점이었고, 전장 제도의 정비에 관심이 많았던 영조에게는 특히 그러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동국문헌비고'는 조선의 문화국가로서의 위상과 체면을 강화하는 책이었던 셈이다. 특히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조차 전장서를 쏟아내는 상황에 조선으로선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40책 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동국문헌비고'가 1769년 10월 착수해 불과 9개월 만에 인쇄돼 나온 배경이다. 1770년 8월 5일자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영조는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착용하고 창덕궁 숭정전(崇政殿)으로 나왔고, 신하들이 '동국문헌비고'를 올리자 월대(月臺) 계단을 내려와 직접 받았다고 한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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