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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목적이냐 경부고속도 발전용이냐"로 논란|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공병대 차출|25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안씨는 병원(회현동)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청와대로 달렸다. 정문 근무자는 미리 비서실장의 통보를 받은 듯 택시를 청와대 본관 앞까지 통과시켜 주었다. 덜덜 떠는 운전기사에게 원래 요금에서 1백원을 더 얹어주고 차를 내리니 이후낙 실장이 대기해 있다가『정확히 15분이오. 역시 교통장관 관록이 있구만』이라고 농담을 건넸다.
『건강하시구만. 병원엔 뭐하러 가 있었소.』집무실에서 안 박사를 맞이한 박 대통령은 곧 정색을 하고 책상 위에 대형 도면들을 펼쳐놓았다.
『자 그러면 우리 일 하나 더 해봅시다.』박 대통령의 말.
안씨는 이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떠맡게 됐다고 회고했다. 하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다른 하나는 갓 발족한 수자원공사의 사장이 되어 소양강 다목적 댐을 완공시키는 일이었다. 이중 소양강댐은 안씨가 자청해서 떠맡았다. 두 가지 모두 3공화국의 굵직한 치적으로 꼽히는 대역사였다.

<최 차관 대통령 설득>
이때 시작돼 73년 완공된 소양댐도 계획단계에서는 진통이 따랐다. 댐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공법은 어떤 것을 택할 것이냐가 진통의 초점이었다. 당시 건설부차관이던 최종경씨(65)와 수자원국장이던 댐 전문가 이문혁씨(73)의 회고를 종합해보자.
『건설부는 국토종합개발 차원에서 홍수를 막고 공업용수도 얻으면서 발전도 하는 다목적댐으로 하려 했지요. 그러나 한전은 작은 규모의 댐이라도 빨리 지어 우선 전기를 생산하는데 중점을 두었어요. 이 때문에 두 기관 사이에 당연히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요. 또 중앙정보부는 일본에서 모종의 대북 관련 공작을 하면서 마루베니 상사에 신세를 진 터라 장비도입 등 공사에 따른 이권을 그쪽에 급히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봅니다. 정보부도 한전 쪽을 지지했던 것으로 압니다.』
대통령이 참석한 월례 경제 동향 보고회 석상에서 한전측 입장을 지지하던 장기영 부총리가『소양댐 건설은 한전에 맡기겠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서열상 한참 아래이던 건설부의 최종성 차관이『이의 있습니다』고 소리쳐 대통령 면전에서 즉석 논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 차관은 김학렬 경제수석에게 통사정 해 박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기회를 얻어냈다.『국가 백년대계가 걸린 일입니다. 단순히 발전용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며 열심히 설명한 결과 마침내 통치자의 최종결심을 받아낼 수 있었다. 댐의 규모가 확정되자 이번에는 콘크리트댐이냐, 사력댐이냐가 초점으로 등장했다.
최근 발간된 정주영 국민당대표의 자서전(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은 소양강댐을 한국최초의 사력댐 방식으로 건설한 것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입찰 전 결정">
『일본공영(일본의 댐 설계회사)의 설계대로 콘크리트 중력댐을 건설하면 막대한 돈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어있어 콘크리트 댐으로 설계한 그들의 저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순간 나는 소양강댐이 들어설 자리 주변에 무진장으로 널려있는 모래와 자갈을 떠올렸다…』(정 대표의 자서전 내용)
이에 대해 댐 공사를 주도했던 안경모씨는 이 자서전 내용에 대해『한마디로 거짓말』이라고 부인했다.
『현대건설은 사력댐 방식으로 한다는 방침이 다 결정된 뒤에 입찰했어요. 일개 업체가 그런 결정에 관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계를 맡은 일본공영이 두 가지 방식 중 콘크리트방식이 더 낫다고 권한건 맞습니다. 그러나 수자원공사가 사업 주체로 결정된 뒤 일본측과 현지조사를 새로 했어요.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활용해 사력댐을 만들면 공사비의 15∼20%를 절감할 수 있겠다는 게 내 짐작이었습니다. 사력댐은 중심부에 단단한 점토가 들어가야 하는데 점토 역시 공사예정지의 상류 4㎞지점에 많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지요.』
안씨는 사력댐 방식으로 최종 낙착된 것이 ▲경비절감 ▲시멘트 수송의 어려움(콘크리트댐으로 할 경우) ▲안보상의 이유(댐이 폭격 당해도 사력댐은 조금 파일 뿐 금이 가지 않음) 등 세가지 여건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공로다툼같이 비칠까봐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입니다. 제가 결정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어요』는 말과 함께.
사력댐 논쟁에 대한 전직 건설부·수자원공사 관계자들의 말은 한결같이 안씨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에 대해 현대건설 간부로 소양댐 공사에 참여했던 이명박 의원은『현대 단독으로 모든 걸 다했다는 주장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현대측 입장에서 보면 사력댐 방식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은 사실이니까 정 대표도 자기주장을 할만할 것이다. 물론 건설부도 독자적인 검토를 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최종결정은 박 대통령이 하지 않았겠는가』고 조심스럽게 평가했다.
소양댐에 이어 팔당댐·안동 다목적댐 등이 속속 들어서고 우리나라 지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육본의 출두명령>
1967년 말, 육군 1110야전공병단 109대대의 작전과장 안무혁 소령(57·전 안기부장·현 한국발전연구원 회장)은 육군본부로 출두하라는 갑작스런 명령을 받았다. 안 소령은 육사(II기)를 마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토목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5년여 동안 교수생활을 한 경력이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귀관은 사관학교출신 중 고속도로 건설기획에 참여할 군내 전문가로 선정됐다』는 것이 육군측의 설명이었다. 67년 12월18일 안 소령은「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의 실무요원 중 한사람으로 정일권 국무총리가 주는 임명장을 받았다. 조사단의 단장은 안경모씨.
이듬해 1월, 지금의 양재톨게이트 부근에서 육군 공병대는 불도저작업을 시작했다. 전투하듯 경제건설을 해치운 박 대통령의 스타일대로 경부속도로의 첫 삽질은 군인들이 시작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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