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수입차 마진 2900만원 '과시 마케팅' 한국은 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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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장안동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박모(54)씨는 최근 1년 반 동안 탔던 에쿠스 JS380(2005년형.구입가 5700만원)을 중고차 시장에서 4800여만원에 팔았다. 얼마 전 일본 여행 때 봤던 렉서스를 사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에서 본 렉서스 ES350의 가격은 약 4450만원이었지만 박씨가 강남 렉서스 매장에서 실제 치른 차 값은 6360만원이었다. 박씨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외제 차를 타면 더 대우받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 유럽계 A사가 3200㏄급 자동차를 한국에 수출하는 가격(차 값에 보험료.운송비가 포함된 CIF 가격 기준)은 5110만원. 그러나 이 차가 국내 항구에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가격은 두 배 가까운 1억24만원으로 불어난다. 이 중 세금은 2034만원으로 판매가의 20.3%를 차지한다. 여기에 수입상과 딜러 몫 2884만원(판매가의 28.8%)이 덧붙여진다. 한국차 딜러의 몫은 판매가의 7% 수준이지만 이 수입차의 경우 수입상과 딜러가 29% 정도를 챙긴다는 것이다.

본지가 KOTRA와 함께 세계 주요 도시에서 팔리는 고급 자동차 값을 비교한 결과 서울의 차 값은 턱없이 높은 편이었다. 렉서스 ES350의 경우 뉴욕 판매가(3만3470달러)는 한국(6만8330달러.1달러=930원 기준)의 절반에 불과했다. 특히 BMW 750i의 국내 판매가는 18만4400달러로 뉴욕(7만5800달러)의 2.4배, 도쿄(9만4490달러)의 1.95배에 달했다. 한국의 자동차 값이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인식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왜 유독 한국의 자동차 가격이 비싼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유럽계 A사 자동차의 경우처럼 높은 세금과 수입상.딜러 몫으로 분류되는 유통 마진이 소비자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자동차 회사들은 또 나라별로 자동차의 수입 규모와 옵션이 다르기 때문에 값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해 국가 간 세금 차이가 갈수록 좁혀지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면 한국의 비싼 고급 자동차 가격은 유통 마진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유통 마진을 챙기는 수입차 회사들이 한국인의 과시형 소비 풍조를 이용한 고가(高價)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조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는 한국 내 소비 성향이 수입차 값이 비싼데도 잘 팔리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베블런 효과'가 한국에서 과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외국 자동차 회사들은 한국 시장에서 고가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얼마 전 독일에서 만난 크리스토프 치허츠니츠 BMW 그룹 아시아담당 이사는 "한국에서 차 값이 비싼 것은 각종 옵션이 다르기 때문이며 가격을 내릴 계획은 당분간 없다"고 말했다. 고가 마케팅은 중고차 값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 기존 구매자들을 만족시키는 방편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수입차 값을 끌어내리려면 소비자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시장의 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본부의 임기상 대표는 "비싸야 명차라는 인식이 바뀌면 수입차 업계가 값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이세정.이현상.김창규.박혜민.문병주 기자(경제부문)

◆ 베블런 효과=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상층 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각 없이 이뤄진다"고 지적한 데서 비롯된 이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을 '베블런 효과'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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