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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심금 울리는 ‘수백만달러의 율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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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04면

내년 1월부터 우리나라에도 배심제가 시행된다. 시민이 형사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를 가리는 데 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배심원의 판단은 ‘참고적 효력’만 갖는다고 규정돼 있지만 법원이 배심원들의 평결을 무시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젠 변호사가 법적인 쟁점을 얼마나 쉽게 풀어 배심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느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변호사가 실력을 총동원해 전세를 역전시키면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쉬운 말과 개성있는 외모 무기 … 자가용 비행기에 호화별장

배심제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스타 변호사(celebrity attorney)’로 뜨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다. 시간당 1000달러(약 93만원)는 기본이다. 한 해 소득으로 수십억~수백억원을 번다. 자가용 비행기를 굴리고, 와인 창고가 딸린 호화 별장에서 주말을 보낸다.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면 거액의 사례비를 받는다. 스타 변호사가 사건을 맡는 것만으로 재판 분위기가 달라진다.

미국의 대표적인 스타 변호사 4명을 보면 일단 말솜씨와 개성 있는 외모의 ‘비디오형’이다. 모두가 ‘얼짱’인 것은 아니지만 각각 자기 전문 분야에 맞는 면모를 보인다. 기업 사건엔 성실해 보이는 ‘훈남’ 스타일, 대중스타 사건엔 명품 옷차림의 배우 스타일이다.

데이비드 보이스(65). 마이크로소프트 반독점 소송, 음악파일 공유 사이트 ‘냅스터’와 미국음반협회 사이의 소송, 미국 대통령 선거 소송 등 주요 재판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율사다. 연 소득이 700만 달러(약 65억원)에 이른다. 타임지가 선정한 2000년 ‘올해의 변호사’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인데, 입학 과정이 독특하다. 원래 다녔던 노스웨스턴 로스쿨에서 교수 부인과 불륜에 빠진 사실이 발각돼 쫓겨나자 예일대를 택했던 것.

그는 조지아주에 포도주 8000병이 있는 와인창고를 갖고 있지만, 평소 수수한 기성복을 즐겨 입는다. 자신의 성실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별명도 ‘고교 교사’. 그의 승소 비결은 복잡한 사안을 단순 명쾌하게 풀어내는 능력에 있다. 법정에서 일상생활의 쉬운 대화체를 쓴다. 재판정에서 소송 서류의 쪽수와 관련 통계까지 낱낱이 기억하고 제시해 설득력을 강화한다.

마이클 J 퓨즈(62)는 징벌적 손해배상 분야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이란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 ‘징벌’로 피해자가 본 실제 손해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배상하게 하는 제도다.

1998년 포드자동차 소송에 이어 2002년 세계적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와 싸워 280억 달러(약 26조원)의 흡연 피해 배상 판결을 받아내 유명세를 탔다. “증거로 말한다”는 게 그의 신조다. 필립 모리스 소송에서 그는 69년 담배의 유해성을 인정한 필립 모리스의 내부 문건을 입수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배심원 설득도 철저히 전략ㆍ전술에 따른다.

배심원 선정 과정에서 그는 배심원 후보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운 뒤 그들을 면접할 때 “안녕하세요. 스미스” 하고 인사한다. 1m90㎝에 가까운 장신인 그는 변론할 때 꼭 무릎과 허리를 굽혀 배심원들과 눈높이를 맞춘다.

보이스와 퓨즈가 기업을 전문 분야로 삼고 있다면, 토머스 A 메서로(57)는 연예인 등 유명 인사 전문 변호사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 외모가 인상적이다. 2005년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 재판에서 13세 소년에 대한 성추행ㆍ불법구금 등 10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 평결을 끌어내 스타 반열에 올랐다.

아마추어 권투선수 출신답게 검찰 측 증인을 코너로 몰아붙이는 데 능하다. 마이클 잭슨 재판에선 소년의 어머니를 “스타를 따라다니며 돈을 긁어내는 사기꾼”이라고 공격했다. 2005년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을 성폭행 기소위기에서 구해내는 과정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반면 브루스 커틀러(58)는 대학 미식축구팀 주장 출신으로 우람한 몸집이다. 악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알 카포네 이후 가장 뉴스를 많이 탔다는 ‘갬비노 패밀리’의 마피아 대부 존 고티의 변호사로 일했다. 80년 후반 고티의 감방 행을 세 차례나 막아냈다. 박력 있는 큰 몸짓으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패밀리 조직원들을 무력화했다. 법원을 수십 차례 드나드는 고티의 옆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됐다. 그는 2001년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액션 영화인 ‘15분’에 살인범의 변호사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속에서 자신의 실명을 그대로 썼다.

‘원조’ 스타 변호사로는 O J 심슨 사건 때 ‘드림팀’의 대표를 맡았던 조니 코크란(2005년 사망)이 꼽힌다. 롤스로이스를 몰며 명품만 입는 멋쟁이였던 그는 공격적인 반대 신문으로 유명하다.

국내의 스타 변호사로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 고승덕 변호사 등이 있다. 방송 토론ㆍ대담 프로그램을 통해 전파를 타고 대중 인지도를 높였다. 이들이 맡았던 재판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스타 변호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우리 법조계에서도 화술을 배우는 변호사가 늘고 있다. 일부 로펌에선 신입 변호사 면접 때 외모를 본다고 한다.

미국 스타 변호사는 외모나 말솜씨 말고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형 뉴스가 되는 사건은 보수를 묻지 않고 맡는다 ▶자신만의 대중적 이미지를 만든다 ▶법 규정부터 들이대지 않는다 ▶배심원이 스스로 결론을 내게끔 유도한다 ▶전문 분야를 만들어 집중한다 등이다.

김&장 법률사무소의 티모시 J 오브라이언 변호사는 “’1 더하기 1은 2’라고 정답을 말하지 않고, ‘1에 몇을 더하면 2가 되느냐’고 묻는 게 미국 변론 기술의 기본”이라고 했다. 연세대 법대 노정호(미국 변호사) 교수는 “한 건에 수십억~수백억원씩 돈을 챙기는 변호사들이 나타나면서 미국 내에서는 ‘스타 변호사의 한탕주의에 춤추는 배심원 시스템을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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