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까지 마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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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연세대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집안의 초대 할머니가 쓴 『상투 튼 사람들 사이에서 15년』이라는 책을 읽다가 내가 경험한 일과 비슷한 일이 1백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부터 1백년전인 1890년대에 언더우드 부부는 양반출신인 한국인 조수와 함께 일본에 가서 한국어성경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같이 간 한국인이 일본 귀족집에 초대받아, 잘 먹으려고 벼르고 갔다가 큰 실망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서처럼 사흘을 굶은 후 상다리가 부러지는 상을 기대했는데,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음식과 일본차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 사람이 나중에 평하길 『왜 일본이 한국보다 잘 사는 줄 알겠다. 한국사람들은 1백냥이 있으면 1천냥어치를 먹어대는데, 일본 사람들은 1천냥이 있으면 1백냥어치를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년에 일본에 갔다가 일본인 친구들과 관광지를 구경하던 중 점심으로 우동을 먹게 되었다. 옆 식탁에서 먹는 사람들의 대접을 보니 기가 막히게 작고 국수도 몇 가닥 들어있지 않아,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조바심이 났다. 대대로 굶고만 살았던 사람처럼 『저것만 먹으면 배가 고플텐데 어쩌나. 뭘 더 시킬까. 언제 시킬까?』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국물까지 한 모금 남기지 않고 다 먹는 것을 보고, 또 동행한 사람모두가 더 안 시킨다는데 나만 한 그릇 더 시키기도 민망해 평소에 마시지 않던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배가 찼다. 버리는 음식물이 많아 환경오염·과소비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그 원인은 「떡 벌어지게」차려야 만족하는 우리네 의식구조에도 문제가 있지만 국물은 남기고 건데기만 건져먹는 식습관도 큰 원인인 것 같다. 요즈음은 식당에서 냉면을 먹을 때도 국물을 다 먹으려고 노력하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국물을 반 이상 먹는 사람은 드물다. 1백년 후, 일본을 방문한 우리나라사람이 어떤 인상을 받을까 궁금한 생각이 든다. 유영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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