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세상 보듬는 아르헤리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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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21면

13년 만에 그가 우리 곁에 온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66). 피아노에서 태어난 듯 악기와 한 몸이 되어 연주하던 1994년 내한 음악회장의 그를 기억하는 애호가라면 추억으로부터 솟아나는 전율을 더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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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듯 건반을 애무하던 아르헤리치의 서늘한 열기를 보면서 문득 함께 소주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에 옷 입히기를 거부하던 피아니스트가 그였다.

헐벗은 음악, 털을 곤두서게 하는 음악, 뼈대가 강하게 솟아 엄청난 힘이 배어난 음악을 그는 난파당한 듯한 객석으로 실어보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그가 독주회 대신 마련한 음악회는 ‘아르헤리치 음악제’의 서울 무대. 일본 규슈 지방을 대표하는 온천 휴양지 벳푸에서 올해 9회째를 맞는 이 음악제는 아르헤리치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아시아의 젊은 연주가, 친구 음악가와 나누는 자리다. 젊은 시절의 야성보다는 연륜과 충만의 모성으로 환하게 보이는 그는 총감독으로 일하며 음악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을 펴고 있다.

아르헤리치는 벳푸 음악제에서 “연주가와 청중이 서로 음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것, 가능한 한 많은 분과 음악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에 큰 뜻을 둔다고 말했다.

“현재처럼 위태로운 지구 상황 속에서 음악이라는 인류 공통의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하루빨리 평안한 세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희망도 밝혔다. 무대를 휘어잡던 태풍 같은 피아노의 여제(女帝)가 이제 음악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전도사가 되어 돌아왔다.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ㆍ김의명 등과 들려줄 프로그램은 쇼스타코비치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 op.94’, 모차르트(그리그 편곡)의 ‘피아노 소나타 K.545 C단조’, 슈만의 ‘피아노 5중주’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칠 줄 모르고 도약하던 아르헤리치의 피아노 소리가 그리운 이라면 조금 아쉬운 선곡일 수 있겠다.

칠순을 바라보며 음악 속에서 평화를 찾는 아르헤리치는 이제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로 연주하는 무대로 우리를 초대한다. 듣기보다 생각하도록 만드는 음악 속에 그는 젊은 시절보다 더 가슴 뛰게 만드는 도약, 영혼의 이완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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