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의 새로운 기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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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25면

나는 성인이 되도록 쉽게 만족할 줄 모른다. 막내 기질이랄까, 정신적 비타민 결핍이랄까. 그러나 어느 누가 ‘이미 충분하다’라거나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탈속해 보이는 사람도 겉을 긁어보면 그 안엔 감각주의자가 숨어 사는 것 아닌가. 우리는 모두 휴식과 안락, 위안과 평안을 갈망하는 불완전한 종족이니까. 그건 또 럭셔리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니까.

이충걸의 네버 엔딩 스타일

우리에게 통용되는 럭셔리의 기준은 늘 달랐다. 금시계만큼 부의 기준이던 커다란 자개장은 드레스 룸까지 갖추는 요즘 세대엔 구식 럭셔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냉장고보다 와인 냉장고가, 꽃보다는 유기농 야채가, 거실을 덮는 카펫보다는 원목 마루가, 보이지 않는 수도관보단 보이는 파이프가, 연줄보다는 내 자신의 박학다식이 새로운 럭셔리의 기준이 된 셈이다. 럭셔리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럭셔리라고 생각하는 착한 사람도 있지만, 아내와 풀 코스 식사를 한 후 숨겨둔 애인과 같은 코스를 (더 우아하게) 먹는 대식가의 럭셔리도 있는 거니까.

럭셔리의 감각은 최초의 단순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구름처럼 부드러운 담요의 감촉, 엄마의 팔베개, 소금기 머금은 해변의 바람,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게 만드는 쾌적함,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고열로 끓는 이마를 짚어주는 누군가의 손바닥, 일어나기 싫어 이불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 아파야만 먹을 수 있었던 오므라이스….

이윽고 럭셔리는 성숙으로부터 온다. 자기 방을 청소하는 것, 오래 대물림할 생각인 물건, 단풍 진 숲길을 산책할 때 걸려오는 그녀의 전화, 뒤늦은 깨달음(어렸을 땐 사치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식의), 나쓰메 소세키의 초판을 읽는 오후, 아홉 살 아들의 태권도 시합 전날 가장 아끼는 펜으로 정정당당한 경쟁에 대해 쓴 편지….

럭셔리는 한편 매일의 경험을 숭고함으로 바꾼다. 참고 참았다가 기내에서 먹는 라면, 미뢰를 녹여버리는 초콜릿, 그 사람이 발음하는 ‘사랑한다’는 말, 마트에서 가장 비싼 비누, 그냥 유리병에 옮겨 담은, 라벨이 아닌 맛을 만끽하는 와인….

그러므로 럭셔리는 공간이다. 산꼭대기 어딘가, 무한대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럭셔리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보내는 더 많은 시간이다. 럭셔리는 색깔이다. 청정한 흰색, 눈 멀도록 드센 빨강. 그러나 가장 사치스러운 건 시간의 색깔이다. 럭셔리는 향기다. 작약 향기이고 빵집에서 나는 냄새이며, 그 사람의 품속에서 나는 냄새다. 럭셔리는 맛이다. 여러 가지 야채를 함께 간 주스 맛이고, 딸아이가 서툴게 깎아준 사과 맛이다. 럭셔리는 소리다. 옛날 오디오를 통해 듣는 카라얀이며, 제대로 된 마사지를 받았을 때 터지는 고통스러운 감탄사다. 럭셔리는 질문과 대답이다. 나를 웃게 만든 그 사람의 질문과, 그 사람을 웃게 만든 나의 대답….

때로 이런 공상을 한다. 팬티만 입은 나는 마당을 50m나 걸어 격납고 문을 연 다음 비행기 엔진을 켜고 일몰 속으로 비행한다. 돌아온 후엔 맥주와 생굴을 먹으러 노량진 시장에 간다.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진짜 럭셔리는 공상에서 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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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의 편집장 이충걸씨는 에세이집『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슬픔의 냄새』등을 펴내고 박정자의 모노 드라마 ‘11월의 왈츠’를 쓴 전방위 문화인입니다. 곧 ‘소비’에 관한 사회학 책까지 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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