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 예술이라는 이름의 전염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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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14면

폴란드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다. “공산주의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술했지 세상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기술하지는 않았다.”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 작품상을 받은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서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는 공산주의 신념을 맹목적으로 고수해 온 냉혈한이다. 어느 날 그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애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그의 사생활을 낱낱이 도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애초의 예상과 달리 비즐러는 그들에게서 어떤 반체제 증거도 발견해내지 못한다. 그들은 억압적인 공산주의 아래서 고통받는 나약한 인간들일 뿐이며, 다르다면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예술가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비즐러는 아무런 혐의가 없자 그들 삶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말하자면 비즐러는 공산주의가 말하는 당위적인 인간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아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눈뜨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는 텅 빈 아파트를 견딜 수 없고, 황무지 같은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는 드라이만의 피아노 소리에 담긴 슬픔을, 브레히트의 시에 담긴 고뇌를 이해하게 된다. 억압과 강제는 일시적인 복종을 낳지만 예술은 전염병처럼 마음에 깊이 침투한다. 그래서 결국 드라이만이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반체제 인사가 되어 위기에 처할 때 비즐러는 필사적으로 그를 구해주려고 한다. 드라이만이 마침내 비즐러의 존재와 희생을 알게 되는 순간 감동적인 후일담이 준비되어 있다. 신파조의 눈물은 넘쳐나도 조용히 감동을 자아내는 영화는 드문 요즘 ‘타인의 삶’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만든다.

★★★☆ 감독: 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주연: 마티나 게덱, 울리시 뮤흐 러닝타임: 137분

추신: 197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도청’ 영화 ‘컨버세이션’으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비즐러가 도청에서 예술을 깨달은 반면 자본주의에서의 해리 콜은 도청으로 완전히 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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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에서 영화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경욱씨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표는 필자가 매긴 영화에 대한 평점으로 ★ 5개가 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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