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중국, 미술과 정치의 애증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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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05면

요즈음 고미술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 사이에서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을 자주 보러 가자”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국립고궁박물원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면서도 소장품을 잘 안 내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전시 규모를 떠올려 보면 당장 비교가 된다. 모두 65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일반에 공개하는 작품은 1만2000여 점인데 그나마 훼손이 덜 되는 자기나 청동기 같은 유물이 중심을 이룬다. 손상이 우려되는 서화는 보기 힘들다. 10월에 전시품을 교체하면서 찔끔찔끔 내놓기에 걸작을 보려면 자주 다리품을 파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이유가 더 중요하다. 국립고궁박물원은 1925년 10월 중국 베이징 자금성 안에 간판을 걸고 문을 열었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만주전쟁을 일으키자 전쟁의 포화로부터 소장품을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 기나긴 피란의 여정이 시작됐다. 일곱 번에 걸쳐 고궁박물원 소장품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 분산해 숨겼다. 트럭ㆍ배ㆍ비행기 등을 이용한 긴 피란길은 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대륙을 탈출해 타이베이로 옮기는 길에 소장품을 나누면서 끝났다.

이후로 60년 세월이 가까워 오는 동안 중국 정부는 대만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해왔다. 그 한 예가 1990년대 미국 순회 전시가 무산된 일이다. 미국 순회전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중국은 “우리 보물을 잠시 맡아두고 있는 상황인데 만의 하나 바다에 빠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대했다. 통일되면 대륙으로 돌아갈 동양문화의 보고(寶庫)를 더 많이 보는 일이 우리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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