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외면한 미 인구조사/윤재석국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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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은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을 해소할 의지가 없는 나라인가 보다. 인종차별시비가 도화선으로 작용해 폭발,결국 미 전역을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이번주 뉴욕에서 열린 한 공판은 이같은 추론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뉴욕 등 한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이 대거 거주하는 대도시와 킬리포니아·애리조나주 등 30개 지방자치단체가 미 상무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따르면,90년 상무부가 미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5백만명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고의로 누락,이들에 대한 연방보조금을 연간 10억달러나 삭감하는 것을 비롯,소수민족에 돌아갈 각종 혜택을 축소하려했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않지만,미국에서 10년마다 실시되는 인구센서스는 단순한 인구조사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시민권자는 물론,영주권자 및 장기체류자에 불법체류자까지도 조사대상이 되며 인구조사로 인해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않는 법의 보장을 받는다.
이를테면 조사에 응한 불법체류자의 자료를 이민국에 넘겨 불법체류자 색출자료로 쓸 수 없으며 그럴 경우 해당공무원이 법적 제재를 받게되는 것이다. 인구조사결과는 주택·교육 등 3백여종류의 국가공공정책의 기조를 수립하는 준거가 되는가 하면,각 주별 하원의원수를 결정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한인교포를 비롯한 미국내 소수민족들에 있어서 인구조사결과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준이 되는 셈이다. 예컨대 2중언어 교사확보 및 소수민족 문화육성기금 배정,특정소수민족커뮤니티를 위한 시설제공 등 소수민족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연방정부의 보조금책정 등 생활에 직결되는 정책의 근간이 되기때문이다. 보다 큰 문제는 미 상무부당국이 이의 수정이나 조정을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으며 그같은 방침이 「공화당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연방예산만 축내는 소수민족」에 대한 부시행정부의 감정적 대응의 결과라는데 있다. 미국은 그들이 인권후진국이라고 몰아세우는 중국이 자국내 55개 소수민족에게 각종 우대정책과 아울러 조선족 등 일부종족에게는 자치주까지 허용,보듬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지않는 한,모든 인종이 한데 어우러진 「멜팅 포트」가 아니라 「백인의,백인에 의한,백인을 위한 인권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면할 길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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