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감성나이'는 생각보다 훨씬 늙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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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박용우 교수

쉬어도 쉬는 게 아니고 놀아도 노는 게 아닌 사람, 일상이 고달픈 당신은 직장인.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시큰둥하다. 직장인들의 감성이 노화하고 있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실제 나이는 서른일지 몰라도 감성 나이는 아마도, 쉰은 된 것 같다. 억측이 아니다. 이 때문에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직장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유 없이 아픈 사람들=모 대기업 사원인 김진태(35)씨는 최근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이 잦아져 병원을 찾았다. 이 증상은 하루에도 수차례 김씨를 괴롭혀 업무에 지장을 주고 있다. 김씨는 혈액검사와 심전도 검사 등을 받은 다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1주일간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 귀국한 김씨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행 도중 단 한차례도 나타나지 않던 어지럼증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재발한 것. 김씨를 진료했던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박용우(44) 교수는 이와 비슷한 환자를 수차례 진료하면서 '감성노화'라는 개념에 주목하게 됐다.

최근 특별한 이유 없이 우울증이나 위궤양, 가슴 통증, 소화불량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부쩍 늘었다. 각종 검사로도구체적인 원인을 밝히기 힘든 증상이다. 박 교수는 환자들에게 우울증 치료제나 각종 약물을 처방하기 전에 '감성노화'라는 개념을 설명해 준다. 한마디로 '행복해지는데 더 노력하라''조바심을 버리라'는 것.

◇감성노화='감성노화'란 신체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감성이 얼마나 젊은가,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따져보는 것을 말한다. 박교수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직장인들의 감성이 무서운 속도로 노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진료했던 환자 가운데 자신이 행복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17일 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감성노화 지수'를 조사했다(체크리스트 참조). 그 결과 환자의 80% 이상이 4 ̄6점을 기록해 평소 자신의 감성을 돌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쉴 틈 없는 업무와 생존 경쟁의 몸부림 속에서 몸도 지치지만 감성은 더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 이는 최근 잇달아 발표된 직장인 관련 설문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23일 스카우트의 조사에서는 1000여 명의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에 대해 지옥.필요악.전쟁터.정글.부담이라고 표현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기쁘고 즐거운 일들에 대한 감흥은 사라진 지 오래다. 놀면서도 자면서도, 밥을 먹거나 책을 읽을 때도 왠지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감성노화의 초기 증상이다. 심한 경우엔 병원을 찾아야 한다.

◇얼룩말이 돼라=박 교수는 직장인들의 감성이 빠르게 노화하고 있는 것은 '불안함'과 '조급함'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낙오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감성을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감성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얼룩말이 돼라"고 충고한다. 얼룩말은 포유류 가운데 유일하게 위궤양이 없는 동물이다. 초원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언제나 사자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눈 앞에 맹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절대 그에 대한 걱정이나 대비를 하지 않는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대비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치열한 준비와 조바심.걱정은 오히려 대비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미래와 업무에 대한 불안감과 걱정 등으로 자신의 감성을 스스로 노화시키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감성노화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 교수는 우선 '선택과 집중'을 강조한다. 기업에 비유하면 문어발식 확장이 아니라 자신있는 사업, 발전 가능성 있는 사업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육성해 키우는 것이다. 취미생활인 노래부르기, 댄스, 뮤지컬 감상 등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우선 순위를 매겨야 한다는 것. 몸짱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듯, 감성 가꾸는 것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실생활에서 감성을 훈련해야 한다. 박 교수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은 ①지하철을 타러 갈 때, 열차가 플랫폼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도 일부러 천천히 걸어본다 ②약속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해서 기다려 본다 ③계획 없이 길을 걸어본다 ④좋아하는 영화나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한다 (이때 주위의 눈치를 보지 말고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손뼉을 치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 등이다.

신체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보톡스나 태반주사를 맞는 것도 좋고, 몸짱이 되기 위해 헬스클럽에 열심히 다니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제는 감성의 노화방지를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때"라고 강조한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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