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한국반도체산업 딴죽걸기/이철호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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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구한말 일본공사가 한성에 부임할때 인천에서부터 서울까지 줄곧 숫자만 헤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왜 그러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서울과 인천간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서』라고 공사는 답했다.
몇년뒤 일본군은 공사가 걸어온 길을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울을 침략했다.
반도체산업은 올들어 최대 수출 주종품목으로 자리잡았지만 요즘 반도체회사들의 임원 얼굴은 그리 밝지 않다.
일본의 보이지 않는 대한공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다」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일본측의 공세는 드러날듯 말듯 하면서 한국 반도체회사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해오고 있다.
이미 연초에 있었던 반도체특허료 협상결과를 느닷없이 지난주 일본언론에 흘리는가 하면 최근 미국의 마이크로 테크놀러지사가 제출한 한국산 반도체 반덤핑제소에도 일본 반도체업계가 등뒤에서 깊숙히 관계된 혐의가 제기되고 있다.
현재 일본측의 공세는 한국산 반도체가 저가로 수출되고 있다는 대외적 측면과 『한국 반도체제품은 일본 특허기술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흘려 반도체 신화에 상처를 냄으로써 국제시장과 한국내부의 여론을 흐려놓겠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미 일 반도체협정으로 87년 이래 미국의 규제를 당해온 일본이 한국도 함께 당해야한다는 물귀신 작전의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도 『무섭게 자라고 있는 한국 반도체산업을 싹부터 잘라 놓겠다』는 세계 제패전략을 드러낸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낳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업계는 일단 『정정당당히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특허료는 적합한 수준에서 주고,반덤핑은 반박자료를 통해 덤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겠다는 입장이고 나름대로의 자신감도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중추산업인 반도체에 대한 일본측 공세의 심각성을 우리국민들이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업계의 한 임원은 털어놓았다.
한번 시작된 「일본주식회사」의 공세가 쉽사리 수그러들 것 같지 않고 또 그 공세는 세계를 제패했을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알아야 이긴다』는 말처럼 요즘보다 우리 국민들이 구한말 일본공사의 숫자 헤아리기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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