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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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독서를 권장할때 흔히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거나 「책속에 길이 있다」는 따위의 말로 책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러나 모든 책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읽기에 따라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권력에 의해 특정한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생겨났으니 곧 금서다.
금서의 역사는 글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다. 정치·사상·풍속·신앙 등을 저해하거나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을때 그 책의 출판·판매·소유를 금지토록 하는 것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일찍부터 금서의 제재방법으로 즐겨 사용된 것이 분서,즉 책을 태워 없애버리는 방법이었다. 서양에서는 BC 411년 아테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저서 『제신에 관하여』가 신을 모독한 죄에 해당한다고 해 불태워 없애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동양에서는 BC 213년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이 유명하다.
금서가 되는 책들은 시대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과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D H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여러나라에서 읽히지 못했으며,중국의 고전 『금병매』는 최근까지도 금서였으나 지금 이 책들을 읽지 못하게 하는 나라는 없다.
역사상 금서가 된 책들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분야가 정치와 사상에 관한 책들이다. 위정자들은 권력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만한 책들이면 가차없이 금서조치를 내려 읽지 못하게 했고,금서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는 언론통제와 억압의 수단으로 즐겨 사용됐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일수록 금서조치를 당하는 책들은 많아지게 마련이고,읽어 도움이 될만한 책들조차 읽히지 못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 36년을 겪는 동안 금서의 혹독함을 어느나라보다도 호되게 겪었고,해방후에도 계속된 정치적 혼란탓에 여러차례의 금서파동을 치러야 했다.
23일 공선협이 공개한 군의 「불온간행물 도서목록」이란 것이 또다시 물의를 빚고 있다. 개중에는 이미 널리 읽혔거나 별로 「불온」하지 않은 책들도 들어 있다. 시대와 상황이 전보다는 많이 달라졌으니 지난 시대의 금서들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할 것 같다.<정규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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