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영선칼럼

대학 교육 국제화의 신화와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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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대학생들이 해외 유학을 부지런히 떠나고 있는 중에 국내 대학들은 국제화 구호를 날이 갈수록 크게 외치고 있다. 21세기 새 문명 표준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지식대국 건설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화 전략이 충분히 국제화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현재 국제화 전략의 가장 대표적 지표가 영어 진행 강의 비율이다. 따라서 대학들은 충분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속에 이 비율을 높이기 위해 무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로 눈앞에 있는 커다란 함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세계 지식 질서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한 어려운 등반을 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이중 전략이 필요하다. 정상에 오르려면 세계가 소비하고 싶어하는 지식의 생산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생각을 세계적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자기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토플 영어나 일상회화 수준의 영어로 세계 수준의 명품 지식을 생산할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에서 엘리엇까지를 심층적으로 깔고 있는 영어로 만들어내는 생각의 깊이를 미완성 영어로 확보하기는 불가능하다. 지적 분석력과 상상력의 세계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확보하려면 영어는 우리에게 필요조건이되 충분조건은 아니다. 동시에 중국의 13경(經)과 25사(史)의 기초적 소양 위에 한국 특유의 생각과 행동의 역사를 제대로 익혀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 지식 생산을 위한 과목들은 완벽한 모국어의 기반 위에 동서양의 세계적 지식을 흡수해 한국적 세계 지식의 피라미드를 쌓아야 한다. 생산의 전략과 동시에 교환과 소비의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분별한 비율 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거나 최소한 이중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교수들을 엄선해 세계 수준의 영어 진행 강의를 맡겨야 한다.

대학 교육 국제화의 완성은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대학 교육을 미국 대학들에 일방적으로 위탁하지 않고 자기 모국어로 완벽하게 세계적 수준의 생각을 키우며, 동시에 동서양을 끊임없이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생각과 행동을 부담 없이 마음껏 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대학 교육의 제대로 된 국제화 모습은 해외 위탁교육이 아니라 국내 교육에 기반을 둔 해외 교육의 접목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울하다. 아무리 국제 수준의 교육을 받았더라도 국내 대학 박사들은 직업 시장에서 외국 대학 박사들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겪고 있다. 한국 대학 교육이 제대로 국제화되기 위해서는 국내 박사들이, 좁게는 국내 학계에서 넓게는 아시아 및 세계 학계에서 스타로 떠오를 수 있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학술진흥재단이 세계 수준의 국내 대학 박사들에게 영구 직장의 기회를 지원해 주는 것이다. 지식 생산 능력이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생계와 유학의 고민에서 벗어나 한국적 세계 지식을 낳기 시작할 것이다. 21세기의 원효.지눌.퇴계는 멀리 있지 않다.

오늘도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의 조기 유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물 설고 낯선 미국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간다. 그들이 두 문화 충돌의 희생자가 되지 않고 두 문화 복합의 승리자로서 세계 지식 질서의 피라미드 쌓기에 성공적으로 기여하려면 우선 국내 대학 교육의 제대로 된 국제화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영선 서울대·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