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원초적 감성 일깨우는 회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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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80년대 전세계 회화의 흐름을 주도했으며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질풍처럼 몰려와 너도나도 함께 휩싸이게 했던 트랜스 아방가르드의 대표적 작품들을 국내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보면 한국의 미술 수준도 이제 만만치 않다.
비록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출발했지만 표현주의의 본고장인 독일의 선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그리고 미국의 뉴페인팅은 60, 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풍미했던 지극히 이성적이고 개념적인 미술에 반발, 인간의 순수한 본능적 감성의 부활을 선언한 낭만주의적 기질이 그 기조에 깔려 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네 작가들은 각자 독특한 개성과 조형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렴풋이 느껴오는 왜곡된 형상(인간의 몸, 얼굴, 해골, 십자가, 뱀, 말, 코끼리 등)을 통하여 원초적이고 지중해 적인 상징성, 그것들과 어울려 화면에서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선과 색감에 의한 추상적 메시지를 내보임으로써 우리의 눈이 아닌 마음에 강렬한 이미지로 와 닿는다.
이러한 강렬한 느낌의 이미지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꾸밈없이 우리의 본능을 자극한다. 그 자극으로 인해 우리는 알 듯 모를 듯한 그것들의 내용을 읽으려 노력하면서 작품 전체가 발산하는 조형적 힘에 오랫동안 매료된다.
이러한 표현주의적 반추상의 그림을 감상하는 한 방법으로 우리는 구태여 소설을 읽듯 작품 속에서 어떠한 이야기 식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의도하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상징의 보편성을 높이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해석적인 태도보다 직관적인 감성의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
이들 네 작가가 선택한 주제는 일방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 본능을 위해 지중해 연안의 혹은 범세계적인 신화·전설·종교적 심성 등 인간의 근원에 해당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후기산업사회의 물질과 이성에 찌든 우리의 「자유로운 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계시적이고 교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어떠한 조형 매체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러움과 감성의 극대화를 주제와 형태라는 측면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네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새삼 아직까지도 이런 유의 그림을 피상적으로 흉내내는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 반성의 귀감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일반 관객에게는 모처럼 만에 일상에 찌든 자신의 원초적 감성을 잠시나마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전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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