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입」은 안여는 백범암살범/오영환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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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백범암살범 안두희씨가 범행후 43년만에 입을 열었다지만 「암살 시나리오」는 군­경 등 핵심권력층의 관련설만 무성한채 여전히 두꺼운 베일에 가렸었다.
안씨는 배후세력으로 김창룡·장택상·노덕술·최운하 등을 지목했지만 그들이 직접적인 암살지령을 내린적은 없고 다만 「반공만이 살길이다」라는 이심전심속에서 거사했다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즉 백범암살은 권력층의 지시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행이 아니라 일시적 흥분상태에 따른 「단독범행」이었다고 앵무새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범행후 종신형을 선고받고도 1년만에 자유의 몸이 돼 군에 복귀한뒤 대위까지 진급했으며 그후 대사업가로 변신한 과거행적과 관련자들의 목격담·증언 등에 비춰볼때 안씨의 증언은 대부분 거짓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심전심속에서 거사하는 테러리스트가 있을까. 무엇보다 안씨고백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가 증언내용을 「조삼모사」식으로 번복하고 있는 점이다.
안씨는 OSS 장교접촉설에 대해 당초 권중희씨에겐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14일 방송회견에선 『OSS란 용어는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보고 처음 들었다』고 발뺌했고 다시 15일엔 『장택상의 소개로 OSS중령과 만났으며 그후 한 중위와 거의 매일 만나 정보교환을 했다』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게다가 김창룡·노덕술의 관련설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지시」했다고 밝혔다가 나중에는 「암시」로 바꾸고 있어 증언에 의혹을 더해주고 있다. 또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건당시의 정황이 백범비서였던 선우진씨(71)등의 진술과 크게 차이가 나고 당시 서울지검장이던 최대교 변호사의 회고록을 보면 당일 경무대나 국무총리·국방장관·경찰 고위관계자 움직임이 미심쩍기 짝이 없다.
결국 안씨는 우여곡절끝에 말문은 열었지만 「입」은 열지않았고 백범암살진상은 밝혀진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당시 소위였던 안씨가 해방공간의 거목이었던 항일지도자 백범을 암살하고도 반성의 빛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점이 아닌가 싶다. 그는 이념적 확신에 앞서 이 사실에 고개숙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가 공소시효나 일사부재리라는 보호막만 믿고 백범암살을 은폐로 일관할 경우 그에 대한 역사의 「단죄」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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