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과 정 대표의 차이(권영빈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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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주 국민당 대표로 관훈토론회에 참석한 정주영씨는 역시 현대의 정회장이지 국민당의 정대표는 아니라는 인상이 다시 한번 강하게 확인되었다. 3시간여 토론을 지켜보면서 필자 개인이 느낀 이러한 인상적 판단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우선 느낌의 편린을 정리해 보자.
첫째,정회장과 정대표는 분명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업가 정회장과 정치가 정대표는 마치 별개의 인물처럼 따로 놀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정회장과 정대표가 같은 인물로 포개져 동일 인물로 부각되지 않았다.
○엇갈리는 두 모습
『나라가 잘 된다면 현대가 망하든 누가 잡혀가든 알바 없다』는 발언은 정대표의 정치적 발언이었고 『나는 철저한 장사꾼이다. 밑지는 장사는 결코 안한다』고 단호히 말할 때는 분명 기업인 정회장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집권을 하면…」이라고 말할 때는 대권을 노리는 정치가 정대표의 발언이었고 「국가경제를 살리려면」을 역설할 때는 기업인 정회장의 경륜이 솟아나고 있었다.
엇갈리는 두 모습에서 우리는 친숙한 정회장에겐 믿음과 기대를 보내지만 낯선 얼굴의 정대표에겐 생경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둘째,정경유착이라는 동일한 사안을 두고서도 정회장과 정대표에 대한 접근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기업인 정회장에게 있어 정경유착은 개발독재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경과조처로 묵인되지만 정치가 정대표에게 있어 정경유착은 언제나 살아있는 쟁점으로 강하게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인 정회장에게 있어 정경유착은 보기 싫게 아물어진 지난날의 흉터지만 정치가 정대표에게 있어 정경유착은 어느 정권에서나 헤집을수록 덧나는 상처로 남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대표가 아무리 정직과 성실만으로 기업을 성장시켰다고 역설하지만 듣는 사람 대부분은 강변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만약 정회장이었다면 굳이 이런 강변을 늘어놓을 이유도,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셋째,정회장 아닌 정대표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믿음이 결여된 공허한 정치적 허언이 남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국회의원 31석의 국민당이 대통령 당선자를 내게 될 경우 집권당의 역할이 순조로울 것이냐는 핵심적 질문에 대해 정대표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낙관론을 펴고 있었다. 민자당이 분해돼 모두가 국민당편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정치 초년생의 안이한 희망사항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비현실적 정치감각
아파트를 절반 값으로 짓겠다는 총선때의 공약은 비록 현실성이 떨어지는 약속이었다 해도 현대 정회장의 말이라면 한번쯤 믿을 수 있다는 유권자의 심리가 투표로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고 짐직한다.
그러나 현대와의 절연을 선언할 수 밖에 없는 정회장의 허상인 정대표의 비현실적 정치·경제적 주장까지 많은 사람들이 믿어주리란 기대는 애초부터 잘못된 계산이 아닌가.
이러한 인상의 편린을 종합하면 결국 총선에서 국민당의 뜻밖의 승리는 정대표로서의 승리가 아니라 현대 정회장의 승리라고 밖에 보지 않을 수 없다.
기업경영식의 선거전략이나 정책홍보전에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음도 국민당의 새로운 능력이었다고 자평하겠지만 그 모두 현대의 정회장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결코 정회장과 결별한 정대표의 능력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정회장의 그림자일 수 밖에 없는 정대표에 대해 과연 누가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정회장으로서 존재할때 묵인되고 용인되던 일들이 모두 아픈 상처로 새롭게 살아나면서 그를 단죄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터인데도 무엇때문에 정회장은 얼굴없는 정대표로 살아남기를 그토록 바라고 있는지,그를 소중한 우리의 기업인으로 기억할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워 할 것이다.
정주영씨가 기업과 관계를 갖는 정회장일때,국민당 정대표가 아닌 장사꾼 정회장일때,그의 말은 믿음과 기대로 받아들여지지만 현대가 망하든 흥하든 관계치 않겠다고 공언하는 정대표일 때는 믿음과 동시에 기대도 사라진다는 평범한 진실을 나는 토론장에서 확인했다.
오늘의 정치상황에서 정치란 소비적 낭비행위이고 기업은 생산적 창조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일생일업의 마지막 불꽃을 생산적 창조행위를 위해 몸바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 우리의 정회장이 투전놀이 같은 정치판의 소모적 낭비놀음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듯한 그의 노후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넘어선 깊은 실망을 하게 된다.
○멈출줄 아는 지혜를
굳이 정회장이 한국정치의 장래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2선에 물러서 다음 주자를 선택하고 밀어주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고,차세대 정치인을 양성하는 후원자의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정대표가 아닌 정회장으로 남아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멈출줄 알고(지지) 만족함을 안다(지족)」는 평범한 진실이 정회장에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비단 필자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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