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원 동향 유정회 의원 견제|상임위장 놓고 한바탕 "자리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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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다른 K씨는 외교 파우치 편으로 외제 품을 부탁해 들여오다 들켜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파우치 안에서 이탈리아 제의 구두와 함께 채 마르지도 않은 물개… 좀 점잖게 말해서 해구신이 잔뜩 들어 있었다는 거예요.』
대다수 유정회 의원들의 드문 과외수입은 정초나 추석 같은 때 박대통령이 주는 노란 봉투였다. 보통 50만원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또 대 신민당 투쟁 등 원내활동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을 때 해당 의원에게 「○○○동지, 축 건투」라고 친필로 써서 주는 특별하사금이 가끔 있었다. 액수는 1백만 원이 정액이었다.

<손발 안 맞아 잡음도>
박대통령의 용인술은 유정회와 공화당이라는 여권의 두 조직을 적절히 제어한데서도 나타난다. 우월한 지위를 활용해 측근의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속마음을 주지 않으면서 이이 제이로 어부지리를 얻는 재능이었다. 철저한 현실주의, 글자 그대로「정글의 법칙」에 누구보다 익숙한 면이 그에게는 있었다.
『어쨌든 유정회 의원들도 회기를 거듭하면서 요즘말로「분위기 파악」이라는 걸 했지요. 지금 젊은 세대가 이해 못할지는 모르지만 당시 유정회 의원들로서는 공화당이나 신민당의 경원하는 태도에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어요.
특히 유신초기 공화당 지역구 의원들은 민선이라는 우월감을 많이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유정회의「두뇌」가 점점 아쉬워졌던가 봅니다. 유정회 2기가 시작(76년)될 쯤에는 두 교섭단체간에 협조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지요.』(주영관씨 64·전유정회의원)
한편 공화당에 몸담고 있던 지역구의원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탐탁한 심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문부식씨(63·현 민자당중앙상무위원회 부의장)의 회고.
『나는 그때 신민당의원(남해·하동) 이었지요. 공화당의원들과 정치적으로는 적이었지만 분명치 같은 지역구의원으로서 공감대는 있었어요.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유정회는 달랐습니다. 공화당 의원들도 술 한잔 먹거나 함께 어울리더라도 우리와 자리를 같이 하려 했지 왠지 유정회 의원들은 기피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한번은 나와 공화당·유정회 의원 등 셋이서 같이 일본에 간 일이 있습니다. 일본의 아는 의원 몇몇과 술자리가 벌어졌지요. 자리가 무르익을 즈음에 일본의원 한 명이「도대체 유정회라는 게 뭐냐. 내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는다」며 완곡히 비아냥대기 시작했어요. 이야기가 계속 되자 이 유정회 의원이 견디다 못했던지「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뜨더니만 끝내 돌아오지 않더군요.』

<날치기통과엔 합심>
다혈질로 알려진 문씨는 그래서인지 70년대 의회역사에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 기록한다. 75년 7월 9일, 제93회 임시국회에서 공화당과 유정회 등 여권의원들은 사회안전법안·방위세법안·민방위기본법안·교육관계법개정안 등 4대 전시입법안을 비롯해 모두 21개 법안을 무더기로 변칙 통과시켰다.
『특히 사회안전법이 쟁점이었어요. 여권의원들이 의사당 건물(태평로)의 식당에 몰래 모여 문을 잠근 채 법안을 전격 날치기당수 없었지요.』
국회 상임위원회 배정에서는 유정회 의원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인기 있는 상임위가 따로 있었지요. 재무·내무·상공위, 간혹 농촌출신 지역구의원의 경우 농수산위를 선호하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유정회 의원들은 달랐어요. 외무·국방·보사·문공위 같은 곳이 더 붐볐지요. 자기 직능에 맞춰 선택한 겁니다. 한 예로 이범준 의원의 경우 상임위 배정 때 소신대로 1, 2, 3지망 모두 외무위만 써내는 바람에 총무단이 애를 먹은 적도 있어요. 지역기반은 없었지만 행정부에 일체 이권청탁이 없었고 자기분야에 관한 한 권위자들이 모여 있었던 겁니다.』(이영근 전 총무)
공화당과 유정회는 상임위배정 이전에 13개 상임위원회(당시)의 위원장자리를 놓고 한바탕 씨름을 했다. 그 결과 여당총무의 몫인 운영위원장자리를 제외한 12개 상임위를 8(공화당)대 4(유정)로 나누어 가졌다.

<잠재적 경쟁자로>
한편 지역구관리가 생명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의원들에게 같은 고향출신의 유정회 의원들은 껄끄럽기 그지없었던 모양이다. 구범모 전유정회의원(60·전서울대교수)의 말.
『나는 고향이 경북 예천입니다. 그런데 2기 유정회 때는 예천 출신이 무려 4명이나 있었어요. 나와 권일·김명회·변우량 의원이었지요. 공화당 지역구의 황재홍 의원(작고)의 마음이 편할 리 있겠습니까. 우리동향인들은 그 때문에 오히려 고향나들이를 자제한 편이었습니다.』
경북 달성(박준규 공화, 문태갑·이종식 유정회) 안동(김상년 공화당, 권중동 유정)·전남 목포(강기간 공화당, 최영철 유정)등 곳곳이 잠재적인 경합지역이었지만 유정회 의원들은 대체로 유신정책 홍보에 나설 때도 출신지역은 피한다든 가 하는 식으로 공화당 현역들과의 마찰을 피했다. 그러나 유정회 의원도 정치인인 이상 야심이 전혀 없다면 오히려 비정상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오봉 의원(제주출신·9대 유정회·작고) 같은 이는 10대 국회에서 공화당 측을 제치고 거뜬치 지역구공전을 방은 뒤 당선돼 화제에 올랐다. 상대인 홍병철 의원이 임기 중(77년) 수뢰혐의로 구속됐던 일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여하튼 당시 정가, 특히 공화당 의원들간에는『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경구가 한동안 유행했다.<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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