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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51)|"김일성만 지도자로 부각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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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해방 직후 남북의 언론에 닥친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남한에서는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과 각 진영의 정치적 이해가 언론이라는 출구를 통해 마음껏 배출될 수 있었다.
미군정의 자유주의적 언론관이 그같은 언론자유를 부추긴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소 군정의 은밀한 손아귀 속에서 「보도의 자유」를 본질로 하는 언론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가야 했다.
소련군의 입북 그날부터 북한 언론에 채워진 족쇄는 해방이 안겨준 새로운 가능성을 아예 밑동부터 잘라낸 것과 다름없었다.
북한언론은 소 군정이 그어놓은 한계 내에서만 움직여야 했다. 그한계는 바로 소 군정이 내밀하게 정해놓은 목표에 의해 정해졌다.「북한 소비예트화」라는 중장기 목표가 그것이었다.
소 군정에 소속된 언론 매체 뿐 아니라 다른 언론들도 이 목표에 끊임없이 동원됐다.
방법은 간단했다.
언론 정책이라는 이름아래 소 군정 소속 매체는 직접 통제하고 기타 매체는 검열이라는 무기로 간접 조종하는 것이었다.

<붉은군대 찬양독려>
모스크바 거주 전 소련군 25군 정치 사령관 레베데프씨는 소 군정의 언론 정책을 이렇게 전한다.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은 소 군정 언론 정책의 기본틀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었지요.
첫째는 조선을 해방시킨 위대한 붉은군대에 대한 선전이었습니다. 전 인류의 태양,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가 이끄는 영광된 사회주의를 선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동구권을 소비예트화 하는데도 이 같은 언론 정책이 동원됐었습니다.
다음은 김일성을 정치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일전 이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소련군 연해주 군관구에는 동방의 정세분석 등을 담당하는 7호 정치국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조선어·중국어·일본어를 하는 장교들을 양성했는데 그들이 후에 북에 들어와 언론을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소 군정 정치 사령부 7호 정치부에서 활동했다.
소련파 일부는 언론 정책을 수행하는 손발 역할을 했다.
소련파 가운데 문필가인 김세일(소설가), 기석복(후에 노동신문 주필), 조기천(시인), 전동혁(시인) 등 28명이 1차로 입북한 것은 이들로 하여금 언론을 담당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 군정은 입북하자마자 평양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평양 매일 신문의 설비 일체와 사무실을 그대로 접수해 소련군 신문사를 조직, 한글로 신문을 발행했다.
김일성보다 앞서 북에 들어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소 군정의 김일성 홍보 작업은 곧 시작됐다.
계속되는 레베데프씨의 증언.
『김일성을 항일 민족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소 군정의 긴급한 과제였습니다. 소 군정은 가능한 모든 매체들로 하여금 「김일성이 소 군정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자이며 장차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는 점을 인민에게 암시하도록 했습니다.
김일성의 일거수 일투족을 부상시킬 것이며 국내파라든가 의용군·무정 장군 등은 거의 취급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방송국에는 방송 시작과 종료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반드시 틀도록 했습니다.
김일성이 비밀리에 지방 순방에 나설 때 사진 기술자를 딸려보낸다거나 스티코프 대장이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기자 회견에 직접 나섬으로써 언론의 분위기를 장악한다거나 하는 것도 그런 취지였습니다』
레베데프씨는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고민했던 사례를 이렇게 제시한다.
『45년 10월14일 평양 공설 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장」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돌았을 때 소 군정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메크레르 중좌와 강 미하일 소좌에게 당시 평남민보 기자 한재덕씨(후에 월남)와 사진 기자를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로 안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거기에 김일성의 할머니와 삼촌·숙모 등 전가족을 모아놓고 사진 촬영과 취재 편의를 제공했고 김일성이 다니던 창덕 국민학교도 취재하도록 했습니다.
이튿날인 10월15일 소련군 신문이라든가 기타 동원 가능한 매체에 특집을 대대적으로 싣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김일성은 이름이 다르지만 가짜는 아니며 소 군정에 의해 선택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인민위마다 검열관>
전 소련군 신문과 조선 신문(후에 노동신문에 흡수) 정치 담당기자 김세일씨(모스크바 거주)도 다음과 같은 「김일성 포장」사례를 전한다.
『46년 3월1일 평양 역전의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이 수류탄 공격을 받자마자 나는 그 사건을 취재했습니다. 그러나 취재한 것의 극히 일부분만이 기사화 되었습니다. 그것도 「신원 불명의 괴청년이…」라는 식으로 나간 것입니다.
상부에서「김일성으로부터 민심이 떨어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기사도 안된다」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 군정이 지배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하지 못한 언론 매체는 보다 완화된 형태의 통제가 미쳤다.
전 평북 인민보 주필 김창순씨(현 북한 연구소 이사장)의 증언.
『해방 초기 각도에 있던 구 일본 신문사 시설을 이용해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거나 창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뜻이 있는 사람들이 건국 준비위원회라든가 비슷한 지역 정치 조직의 양해나 허락을 얻어 사용할 수 있었지요 .
형식상 신문 창간은 조건을 갖추어서 군정에 등록만 하면 됐기에 이런저런 신문들이 나왔습니다 (47년 민주주의 민족 전선 발행 『조선 해방 1년사』에 따르면 46년초 북한에는 37종의 신문이 발행됐다).
이 회사들은 인선이나 운영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기사 내용에 관한한 달랐습니다.
소 군정의 검열 때문에 반소·반김일성 기사가 처음부터 나갈 수 없었지요. 뿐만 아니라 논설이나 국제 관련 기사는 어느 매체든 독자적으로 쓰지 못하고 군정으로부터 받은 기사만을 써야했습니다.
국내 기사도 가령 「방랑시인」같은 문학 작품을 기사화하려고 하면「혁명가가 무슨 방랑이냐」하면서 못내게 했습니다.
소 군정을 반대하는 우익 신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검열 방법은 각 지역 인민 위원회에 파견된 검열관에게 인쇄 직전의 대장을 가져가 검토 받고 이들이 서명해야 신문을 찍을 수 있었어요.
서명한 대장은 증거품으로 한 달 동안 보관했습니다』

<인민보 시설 접수>
소 군정은 언론의 내용을 검열이라는 수단을 통해 조종하는 한편 여타 언론 시설도 장악해 나갔다.
김창순씨의 증언.
『45년말과 46년초가 되면서 차츰 각 도 인민 위원회 직속으로 인민보가 있고 도당 직속의 노동신문이 하나씩 있는 형태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노동신문이 등장한 것은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커져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신장된 세력을 무기로 각도에 노동신문사를 만들때 각도 인민보의 시설들을 멋대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인민보는 적산으로 분류된 일제때 신문사 시설을 뜻 있는 사람들이 건국 준비위원회 같은 조직의 승인을 받아 이용한 것이므로 소 군정측에서 보면 불법이라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도 처음에는 가만히 있더니 자신들의 힘이 점점 커지는 듯하자 뒤늦게 법을 내세우며 가져간 것이지요 .
별 도리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평북 인민보 같은 경우에는 언론인들의 저항으로 접수하지 못해 평북 노동 신문이 평북 인민보 사무실에 와서 더부살이를 해야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었어요』
소 군정과 공산당에 의한 언론 장악은 45년 10월 분국 창설을 계기로 만들어졌던 기관지「정로」가 46년8월 북로당 창당을 계기로 노동신문이라는 중앙당 기관지로 전환되는 시점에 완결됐다.
북로당 창당과 더불어 창간된 본격 기관지 노동신문은 소 군정과 공산당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호였다.<특별취재반-북한부>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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