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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있나 없나?

중앙일보

입력

호메로스와 플라톤 시대부터 끝없이 이어진 논쟁이 더욱 치열해진다

뉴스위크블레즈 파스칼은 굉장한 경험을 했다. 그는 나중에 그 경험을 모두 종이 위에 옮겨 적으려 했다. 자신의 눈으로 봤다고 생각한, 번득이는 그 무엇들을 잡아채 단숨에 써내려갔다. 그 이미지는 경험론적 기준에서 보면 환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실제라고 생각했다. 수학적으로 훈련된 자신의 뇌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 일이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파스칼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저녁 10시반에서 0시반 사이라고 그는 썼다. 그날은 기독교력으로 성클레멘테(교황이며 순교자였다) 축제일이었다.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다. 신은 존재했다. 기독교 이야기도 진실이었다.

“확실성, 확실성, 진심,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며 당신의 하나님. “ 그의 사후 발견돼 ‘팡세(Pensees)’로 발간된 그 글에서 파스칼은 자신의 두 가지 열정인 수학과 신앙을 혼합해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라는 논리를 펼쳤다. 내용은 간단하다. 신이 존재하며 신을 믿는 쪽으로 내기를 걸어야 현명하다는 가설이다.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모두를 얻게 되고,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앙의 비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신앙의 비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신앙도 비이성적이며, 믿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동화의 세계에 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댄다. 이번 주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유월절과 수난 주간을 맞지만 신의 존재를 둘러싼 오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뉴스위크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는 신을 믿는다고 말했고, 82%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

반면 응답자의 절반은 적어도 한 사람의 무신론자를 “개인적으로 안다”고 말했고, 47%는 미국이 과거보다 무신론을 더 많이 수용한다고 생각했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여론조사에서 그렇게 말하기를 꺼리는 숨은 무신론자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다른 문화적 지표도 명확하다. 신앙에 반대하는 논리를 펴는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많은 미국인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주장에 동조하고, 그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신앙의 파괴적 효과를 받아들인다는 증거다.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은 적어도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의문이 최근 들어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사실은 종교가 우리 사회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우려가 커져간다는 뜻이다. 종교는 테러리스트들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배아줄기세포 연구 정책 수립 등 다양한 분야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뉴스위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6%가 조직화된 종교의 세력이 근년 들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또 32%는 종교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다고 말했다.

구약 전도서에서 말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실제로 무신론자(atheos)라는 용어는 고대부터 사용됐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근대 사회가 형성되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청천벽력 같은 폭로는 회의주의의 새로운 부상을 부채질했다.

18세기가 되면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토머스 제퍼슨이 말한 ‘수도사의 미신(monkish superstition)’이 패배했다며 기뻐했다(그러나 너무 성급했다). 19세기에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내놓았고, 신의 존재를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의심하는 나머지 영국 시인 매슈 아널드는 ‘신앙의 바다(Sea of Faith)’가 썰물을 맞았다고 믿었다. 그 신앙의 바다에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마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 종교를 둘러싼 논쟁은 전혀 새롭지 않다. 다만 요즘 들어 논쟁이 더욱 치열해졌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좌파는 신자들을 미신적이고 권력에 눈이 먼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파는 때때로 기독교적 아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무신론자와 세속주의자를 공격한다. 따라서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 중 다수는 신앙과 이성,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비중과 역할을 두고 좀 더 신중한 토론이 이뤄지길 바란다.

그런 취지에서 뉴스위크는 저명한 무신론자 샘 해리스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새들백 교회의 목사 릭 워런을 초대해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궁극적 문제를 두고 토론하도록 했다. 해리스는 무신론을 옹호하는 ‘신앙의 종말(The End of Faith)’과 ‘어느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Letter to a Christian Nation)’라는 베스트셀러 두 권을 썼고, 워런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Driven Life)’을 펴냈다.

이 두 사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들의 제시하는 견해가 전혀 뜻밖은 아니다. 그러나 그 주장의 세부 사항과 기지의 번득임은 현 시점의 미국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충돌의 본질을 밝혀준다. 워런은 성서에서 계시한 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기독교 전통, 그리고 이성을 믿는다. 예수가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일 뿐 아니라 예수가 스스로 말한 바로 그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는다.

당연하지만 해리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나는 우리가 ‘신화’라 부르는 공동묘지에 묻힌 제우스(그리스), 이시스(이집트), 토르(북유럽), 그리고 수천 명의 다른 죽은 신들을 믿지 않는 만큼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신도 믿지 않는다. 그들 전부를 똑같이 의심한다. 이유도 똑같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사이의 논쟁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워런과 해리스는 그중 많은 차원을 넘나든다. 몇 가지 차원을 소개한다. 신자들은 기독교 성서나 이슬람 코란에 적혀 있기 때문에 신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직해주의적 주장이며 신이 직접 썼거나 신의 말을 받아적었다는 성서를 비판없이 받아들인 결과다. 도덕적 차원도 있다.

신자들은 인간에게는 선악을 이해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이해력은 신이 우리 각자의 마음에 심어주었다고 주장한다. 또 설계론적 차원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 중심에 지적인 인도자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물론 논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려 드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중 어느 주장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성서는 인간의 손과 마음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수 세대에 걸쳐 번역되고 필사됐다. 학문적 연구에 따르면 성서는 역사적, 문헌적 문제가 많아 완벽한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례로 복음서의 저자 중 한 명인 요한은 자신이 현 세계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역사나 전기를 쓰지는 않았다고 명백히 밝혔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다고 요한은 말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도덕의 문제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감정은 자연 도태의 과정에서 번창 가능성이 높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장 바람직한 특징으로 진화됐을 가능성이 있다. 또 설계의 문제에선 창조주가 있었다는 명제를 뒷받침할 근거가 성서 외에는 없다(물론 다윈도 태초에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인정했다).

이런 반론에 반박하는 주장도 거세다. 이 논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무신론자들은 140억 년 전 우주 탄생을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일은 논외로 치고, 신자들이 승천하는 구원자들, 갈라지는 바다, 불타는 덤불이라는 공상적 이야기를 믿는다고 조롱하는 경향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곤혹스러운 질문을 아주 쉽게 던진다. 신이 위대하다면 아기들이 왜 암에 걸리나? 무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당하나? 신이 사랑의 화신이라는데 신자들은 왜 신의 이름으로 살육을 저지르나? 왜 하나님은 첫 오순절이 지나고 바로 두 달 뒤 대규모 기적 행하기를 그만두었나?

전부 탁월한 질문이다. 신자들은 신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횡포이며, 신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로 그를 사랑할지 미워할지, 복종할지 따르지 않을지 선택하기를 바라셨다고 대답한다. 인간이 만든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끔찍한 선택을 하기 때문이며,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악이나 질병은 수수께끼다. 신이 우리에게 전부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신에게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목표가 있다는 주장이다. 일어나는 일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전부를 안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신이든 일단 믿으려면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표현한 ‘불신의 자발적 중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가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이 믿듯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의 예수가 그 전이나 이후에 어떤 다른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게 반드시 이성적이진 않다.

예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자신의 부활을 믿으면 양의 속죄하는 피로 깨끗하게 씻어진다는 예수의 말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믿어야 할까. 해리스가 지적하듯 자기 삶의 다른 모든 일에서는 사사건건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이 웬일인지 오래전에 사라진 제국의 한구석에서 죽어간 성서 저자들의 말은 그토록 기꺼이 믿게 됐을까.

기독교인말고도 사실을 뛰어 넘어 믿는다는 신앙의 비약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다. 저명한 랍비 아브라함 야콥 헤셸은 1967년 이렇게 말했다. “신은 우리가 그를 쉽게 믿도록 하거나, 그 믿음을 쉽게 지속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신앙의 불안정함, 감당하기 힘든 헌신의 부담. 또 신성을 부인하는 사실들엔 막강한 위력이 있다. 불가지론의 논리는 감동적이며, 신에 도전하는 사건들은 아주 볼 만하다….

우리 신앙은 연약하며 오류와 왜곡, 기만에 쉽게 빠져든다. 신과 만물의 아버지, 조물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최종적 증거는 없다. 증인만 있을 뿐이다. 그중 최고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다.” 최종 증거가 없다. 이것이 긍극적인 단서다. 의심과 믿음은 상충하지 않는다. 그 두 가지는 각각 같은 전체의 일부분이다.

역사는 종교도 인간의 전체 이야기 중 일부라고 가르친다. 두려움에서, 희망에서, 아니면 둘 다에서 생겨났든 간에 인간은 종교적 욕구를 타고난 듯하다. 예외는 믿는 사람이 아니라 무신론자다. 물론 신자들도 무엇을 믿는지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일치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질서를 잡아주는 실체가 있으며, 거기에는 사후 지복의 삶을 누리는 구원이 포함된다. 의로운 자만이 그런 혜택을 받는다는 주장도 있고, 특정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지복을 누린다고 말하는 신자도 있다.

또 누가 죽음의 어둠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되며 누가 그렇지 않은지 확신할 정도로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신자도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하나님의 의지는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교황, 어쩌면 요한 바오로 2세를 제외하고는 인류 역사에서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한 그레이엄조차 그렇게 말했다. 2006년 여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산꼭대기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도덕 의식이 투철한 무신론자와 독실한 이슬람 신자, 독실한 유대교인 중 누가 천국에 가게 되나? 이 질문에 그레이엄은 그 결정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내린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신은 정말 있을까? 적어도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을 듯싶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실존한다.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1901년 영국 에든버러대의 유명한 기퍼드 강연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몸담은 브린모어대의 한 동료 말을 인용했다.

“진실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신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신은 때로는 육류 납품상으로, 때로는 도덕적 지지자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사랑의 대상으로 이용된다. 신이 스스로 유용성을 입증한다면 더 이상은 필요없다. 신이 실제로 있을까? 어떻게 존재하나? 신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전혀 무의미하다. 신이 아니라 삶, 더 많고, 더 크고, 더 풍부하고, 더 만족스러운 삶이 종교의 궁극적 목표다.”

하지만 어떤 신을 말하나? 기독교의 아버지인 신인가, 유대교의 아브라함, 이삭, 야고보의 신인가, 이슬람교가 태동하던 순간 동굴에서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말을 한 신인가, 아니면 일부, 아니 한 명에게만 알려진 다른 신을 말하는가? 어떤 종교를 갖든 우리가 알기를 원하고 안다고 생각하지만 신이 누구인지, 존재하는지는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가 말한 “붉게 물들어 죽어가는 종말의 저녁(the last red and dying evening)”이 오기까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해야 실용적이지 않을까.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은 추상적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종교는 현실 세계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오래전에 글로 옮겨진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한다면 그 말이 아무리 떠받들어진다 해도 이성과 책임을 포기하는 행위다. 이성과 책임을 신의 선물이라고 믿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포기할까.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은 사도 바오로가 주장했듯 누군가가 노예라면 신이 그렇게 결정해준 운명 때문이라고 정말 생각할까? 이슬람 신자 대다수가 실제로 그들의 의무가 이교도 살해라고 믿을까? 둘 다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말했다고 읽혀질 소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과 해석을 통해 많은 독실한 신자는 그런 구절을 은유적으로 보거나 그 뜻이 역사적, 문화적 변화에 의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성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서의 권위가 분명하고 확실한 추론과 상충한다면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진실에 어긋나는 쪽은 성서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성서에 부여하려는 의미다.”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언급으로 기독교인들은 계시의 궁극적 권위를 포기하지 않고 과학적, 사회적 발전을 구가하게 됐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지적 전통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예수가 주님이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기본적인 논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항과 타협하게 됐다. 그럼에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그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의 불에 던져진다고 확신한다.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거 봐라, 기독교 같은 배타적인 종교가 악의 세력이라고 우리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신앙을 버리고 합리성과 과학으로 그 자리를 채우면 모두에게 좋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진다.” 그러나 이런 무신론적 해법에도 문제는 있다. 해리스는 ‘어느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노예제 폐지론자에, 종교를 노예제에 비유한다.

그러나 완전히 과학적인 세계라 해서 실험 연구의 결과와 해석, 적용을 두고 독단적 주장을 하고 서로 싸우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까? 과학이 실체의 본성을 둘러싸고 나름대로의 신조와 주장을 가진 일종의 종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험실이 교회를 대체하고 뇌가 성서를 스캔하는 식이다. 일반 종교와 다르기는 하겠지만 더 낫다는 보장이 과연 있을까?

그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사실 이 질문은 다분히 수사적이다. 인류가 머지않아 종교적 세계관을 과학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와 신자 사이의 논쟁은 가장 실용적 형태에서 보면 공공적인 삶과 사적인 믿음에 관한 것이다. 대개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정치판이나 학교 교실, 과학 실험실이나 법정에서 너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때 가장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성토한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신정 체제, 다시 말해 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정부는 미국인 대다수가 소중히 여기는 그런 사회를 형성하는 데 적합지 않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탐구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화를 형성하려고 종교를 공공생활에서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사실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영향력을 두고 다투는 서로 다른 파벌들을 문화를 통해 관리하면 문제가 없다.

미국의 실험이 기발한 이유는 종교·경제·지리적 파벌 등 모든 세력이 특정 한계 내에서 권리를 주장하도록 허용한 공화주의적 경기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어떤 극단주의도 억제가 가능하다. 이처럼 미국의 정부 형태는 의도적으로 느리고 성가시며 급진적 개혁에 저항하도록 만들어졌다.

자유와 공화주의적 가치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극단주의를 막는 방호책이다. 예를 들어 종교가 교육이나 과학 정책을 좌우해선 안 된다. 그러나 종교가 우리의 공공생활에서 나는 많은 목소리 중 하나가 된다 해도 절대 나쁘지 않다(좋은 점도 많다). 한 파벌만 목소리를 내고 다른 파벌의 권리를 막아선 안 된다. 장점에 근거해 싸워야 하며, 종교는 유일한 세력이 아니라 여러 세력 중 하나가 돼야 한다.

이런 온건한 해결책은 무신론자도 열렬한 신자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온건한 접근법이 더 나을지 모른다. 보수적인 신자들은 중도파가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몇몇 무신론자는 해리스의 표현대로 “종교적 온건주의자들은 나름대로 끔찍한 신조”를 가질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근거없는 신앙을 존중하게 되면 평화로 가는 길이 닦여진다고 상상한다. 그들은 성서를 그대로 믿음으로써 부담하게 되는 개인적, 사회적 비용을 원치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중도적 접근법이 가장 실용적일 가능성이 크며, 처칠의 민주주의론을 바꿔 말하자면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해결책 중 최악”이다. 무신론자들은 논쟁에서 신을 추방하려 한다. 그러나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는 신자들의 권리는 어떻게 될까?

또 가장 열렬한 신자들은 토론의 장에서 무신론자들을 쫓아내려 한다. 경멸을 가장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전체의 이야기에서 방해받지 않는 일부분의 역할을 담당하는 무신론자들의 권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어느 쪽도 논쟁에서 위협받아선 안 된다. 양쪽 모두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있다면 상대방의 생각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기사에 이어지는 토론이 바로 그렇다. 어림잡아 말해 릭 워런은 토론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 샘 해리스도 순간적인 회심으로 무릎을 꿇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손하게, 냉정하게, 간간이 웃음꽃도 피우면서 대화했다. 이런 대화가 상대방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평생을 보낼 듯한 두 사람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은 문화 전쟁의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이다.

마지막에 워런은 예수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으며, 복음서가 전하는 대로 그 자신이 말한 사람이었다는 데 돈을 걸며 “주사위를 던졌다”고 말했다. 해리스는 다른 쪽에 걸었다. “때가 되면 이 논쟁에서 한쪽이 완전히 이기고 다른 쪽이 완전히 지게 된다.” 파스칼이 살았던 시대에서 4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살았던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땅에서 두 사람이 파스칼의 내기를 한다. 누가 이길까?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아직은.

<뉴스위크 7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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