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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업과 정부가 답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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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렇게 준비하고도 취업이 안 되면 남 탓을 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태백'을 자조하면서 취업 재수를 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단념하고 조용히 숨어 버리는 게 우리 국민이다. 모든 경제적.심리적 부담은 본인과 가족이 진다. 고용을 늘려 달라 데모하지도 않고, 정부에 생계를 보조해 달라고 손 벌리지도 않은 채 개인 책임으로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다. 이처럼 '그냥 놀고 있는' 20, 30대가 60대 이상의 비경제활동인구보다 많은 것이 우리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눈이 높아' 이들이 백수로 지낸다고 나무란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릇된 의견이다. 하나는 국민의 눈이 높은 덕분에 지금껏 다이내믹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국민은 국민소득 100달러라는 세계 최빈국의 시기(1950년대)에 이미 초등학교 취학률 90%를 달성했다. 이런 '선행 투자'가 없었다면 이후의 고도성장은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국민의 눈이 높은 것이 개인들의 탓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 국민은 '공돌이.공순이'라 불리는 게 싫어 자식만이라도 공부시키려 했다. 기업은 생산현장을 천대한 원죄가 있는 것이다. 역대 정부도 생산현장의 처우를 사회경제적으로 개선하기보다 '억울하면 출세해, 공부만 잘하면 가능해'라는 논리로 교육 과열을 유도한 책임이 있다.

심각한 것은 이렇게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도 정작 '백수'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젊은 층이 그냥 놀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괜찮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업 규모 간 격차가 큰 우리나라에서 괜찮은 일자리는 주로 대기업이 제공해 왔다. 하지만 근래 대기업의 고용 기여도는 완전히 마이너스다. 일자리를 창출하기는커녕 삭감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은 어떤가. 일자리 수에 있어서는 확실히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괜찮은 일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임시직이나 일용직이 너무 많다. 그리고 고용이 지나치게 유동적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15세 이상 인구 중 1년 동안 취업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되는 고용불안 사회가 되었다. 이에 대해 정부도 책임 있는 대책을 세우고 있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기업은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책임을 져야 하고 국민은 이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큰 기업들의 홈페이지를 열어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항목 중에 '사회공헌활동'이 있다. 주된 메뉴는 소외계층 지원, 장학사업, 환경보전 등이다. 물론 아름답고 의미 있는 활동이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괜찮은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기업이 사회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소외계층 지원은 기업이 여유가 있으면 할 수 있고 또 기업이 안 하더라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은 고용을 늘리면서 동시에 이익도 실현해야 하고 또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훨씬 어렵고 책임이 크다.

인건비를 고정비가 아닌 변동비로 취급해 이익을 남기려는 생각도 재고해야 한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면 잠시야 비용이 절약될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누가 기업에 주인의식을 갖고, 누가 부가가치를 생산할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인건비를 고정비로 전제한 위에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이라 할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환경을 정비하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국민은 스스로 향상시켜 왔다. 이제는 기업과 정부가 국민의 '높은 눈'에 답할 때다.

우종원 일본 국립 사이타마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