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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자율권 조금이라도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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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부는 현재의 대학입시 정책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초등학교부터 그 많은 학생이 해외로 유학을 떠나는 현실과 입시정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인가. 공부를 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노력하는 만큼 충분한 보상이나 성과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이럴 바에야 자신이 노력한 만큼 충분히 성과가 나타나는 외국 대학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 아닌가.

지난달 28일 주요 대학 입학처장들이 모여 교육부에 건의키로 한 논술 가이드라인 폐지의 핵심은 정부가 모든 대학을 획일화해 하향 평준화로 몰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대학 나름대로 비전을 갖고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달라는 것이다. 대학마다 차별화된 발전 전략을 취하고 있는 만큼 이에 걸맞은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자율성을 부여해 달라는 것이 요지다. 작금의 국내 대학들은 국내외적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차별화된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대학 간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대학이 글로벌화 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명칭만 같을 뿐이지 내용은 대학의 발전 전략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느 대학은 영어 강의의 확대전략을 통해, 어느 대학은 외국인 교수 및 유학생의 유치 전략을 통해, 또 다른 대학은 외국 대학과의 복수 학위제 확대를 통해 글로벌 전략을 취하는 식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영어 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고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나가는 기회도 늘게 된다. 그런데 대학 논술에서 영어실력을 일절 평가하지 못하도록 영어 지문 출제를 금지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것인가?

정부는 3불정책의 하나인 대학 본고사가 부활하면 사교육의 광풍이 휘몰아쳐 공교육 체제는 무너지고, 결국 일부 계층에 의한 대학교육의 독점 현상이 심화된다고 주장한다. 대학은 정부가 우려하는 그런 본고사 부활을 허용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본고사와 관련해 대학이 요구하는 핵심은 이미 대학 자체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대학별 고사인 논술 및 면접고사를 대학의 특성에 맞게 치를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것이다. 논술은 본고사와 달리 학생들의 다면적이고 통합적인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논술 가이드라인만 폐지하면 대학의 신입생 선발에 있어 자율성이 상당히 신장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대학가에는 분권화의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그 핵심은 단과대학의 자율 경영체제 도입과 이에 따른 경쟁의 심화다. 전공의 성격이 판이하고 그에 따라 특성이 다른 각 단과대학을 같은 대학이라는 한 울타리에서 똑같이 자원을 배분하고 끌고 가는 방식은 구시대적 경영체제이고, 각 단과대학 고유의 차별화된 경쟁력 제고를 저해한다는 시대적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단과대학 학장 중심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학교 당국은 그에 걸맞은 정책을 지원하는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런 분권화 바람은 치열한 국내외 대학 간 경쟁체제 속에서 학교본부의 중앙통제식 획일적인 경영 또는 정책 집행체제로는 더 이상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인식을 거시적인 대학입시 정책을 입안하고 지원하는 교육부가 아직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정부와 대학은 현재의 핑퐁식 견제와 비판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대화의 장을 마련해 문제를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 나가야 한다.

박천일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입학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