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민족성 되새긴 소설 『늘푸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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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87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작가 김원일씨의 소설 「늘푸른 소나무」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우리 한국사에서 어쩔 수 없이 어두운 그림자로 기록돼있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울산 언양지방을 배경으로 한 우리 한민족의 처절한 수난과 생존을 의한 항거와 몸부림은 지난날의 너무도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백사충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계층의 항일독립운동 과정도 물론 의미 있는 것이었으나 특히 어간이라고 하는 한 연약하고 초라한 기층 민중이 폭정과 압박 속에서 의식의 눈을 뜨고 부단한 금욕과 채찍질을 통하여 석주율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련극복의 상징으로, 모름지기 성인 화되어 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재소설의 말미에 주인공 석주율이 일본순사의 충격에 쓰러지는 장면은 일견 거대한 힘 앞에서 현실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민중의 당연한 귀결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이 작품은 주율의 그 죽음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탁월한 민족성을 잘 그려주었던 것이다.
구성상의 무리한 전개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눈먼 여동생 선화의 번뜩이는 지혜와 꼽추 김기조의 인격변화, 그리고 봉순네나 정심네를 동원한 인간적인 애욕의 갈등은 자칫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주제를 부드럽게 이끌어주었다고 본다.
주율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태화강 나무다리 아래 봉순네 남매가 천형을 안고 잠들어있는 모닥불 가에서 가부좌한 주율이 불길 속에 자신을 태우는 환각은 바로 비슷한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예수나 간디와도 비교되면서한 순결한 구도자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거룩한 모습으로 독자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각고의 작품을 남긴 작가와 중앙일보와 함께 독자의 진한 감동을 나누고싶다. 【차동혁<전북 군산시 소룡동 동아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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