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제 허물 못 보는 한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변검(變)정치를 그만둬라."

지난달 28일 한나라당이 내놓은 논평 제목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까지 지낸 김근태.천정배씨 같은 대선 주자들이 돌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단식에 돌입한 걸 비판한 것이다. '변검'은 고개를 돌리는 짧은 순간 가면을 바꿔 쓰는 중국의 전통 기예다.

이 논평은 김.천씨의 단식을 "대선 표만 의식한 속이 뻔히 보이는 기획"이라 규정한 뒤 "한.미 FTA는 대권용 불쏘시개가 아님을 명심하라"는 충고로 끝을 맺는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하지만 남의 포퓰리즘을 꾸짖은 지 닷새 만에 한나라당은 국민연금법 개정안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당론으로 제출했다. 65세 이상 국민 80%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선 정부 예산이 내년에만 3조770억원이 든다. 열린우리당 개정안의 2조3800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예산은 급속도로 늘어나 2020년에는 24조5000억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한나라당의 내부자료에 나와 있는 액수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방향으로 연금제도를 고치는 건 누가 뭐래도 포퓰리즘 혐의가 짙다. 민주노동당이라면 모를까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외쳐온 한나라당이 이런 법안을 들고 나온 건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한나라당의 수정안은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5표가 부족해서였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도부는 수정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재개정안을 제출하겠다"(전재희 정책위의장)고 벼르고 있다. 동시에 지난번 표결에서 당론을 따르지 않은 7명을 당 윤리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했다. 다음 표결을 대비한 단속이다. 소신을 지켜 표결에 불참했다 윤리위에 서게 됐다는 이해봉 의원은 4일 "(연금제에 대한 당론은) 한나라당이 제일 비판해 온 인기영합주의"라며 "당이 정체성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이런 목소리는 소수일 뿐이다.

5일 한 당직자는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하자는 차원에서도 연금법을 재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쏟아냈던 '대선 표만 의식한 뻔한 기획''변검정치'라는 비판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행태다. 한나라당이야말로 국민연금제도 개혁을 대권용 불쏘시개로 보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남궁욱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