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외교문서 11만9000여 쪽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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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국 정부는 1976년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피말리는 대미 외교전을 기울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외교통상부가 4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내세웠던 지미 카터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당선 가시권에 들어가자 정부는 카터 후보의 한반도 정책을 바꾸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문서량은 11만 9000여 쪽에 달한다.

우선 정부는 76년 7월 외무부와 중앙정보부 주도로 '한반도 정세 및 한.미 관계'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카터 선거 캠프의 핵심 참모들에게 보냈다.

이 보고서는 남북 대치 상황과 군사력 비교,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 민주주의와 자유.인권 문제에 대한 해명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국의 발전 목표와 미국의 국가 이념이 부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한국의 인권 상황과 관련해 이 보고서는 '한국이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개인 자유의 신장에 앞서 공동체적 사회정의가 우선이고, 일부 성직자에 대한 기소는 국가안보 문제에 대한 범법 사실에 기인한 것일 뿐 종교의 자유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터 후보는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시각이 있었다.

정부는 또 그해 8월 조지아주 출신 사업가로 카터의 정치참모 역할을 했던 존 포프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김영선 당시 주일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포프를 면담하게 했다. 김 대사는 포프를 만나 "주한미군이 유럽과 극동으로 소련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북한군의 남침 억제에도 긴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포프에게 주미 한국 대사와 카터 후보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카터 집권에 대비해 '80년까지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전술 핵무기를 계속 남한에 배치할 수 있도록 미국을 설득한다'는 대미 외교 목표를 설정했다.

정부는 특히 자주국방이 달성될 80년까지는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미국이 전술핵을 철수하더라도 이 사실이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독자적으로 접촉해 대북 무역제재를 완화하지 않도록 4자회담을 추진해야 한다는 인식도 갖고 있었다.

정부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77년 3월 카터 전 대통령은 '82년까지 주한미군 완전 철군을 목표로 4~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한국에서 미군을 뺀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보했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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