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현장 … 자동차부터 불 붙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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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본격 발효되면 국내 자동차 시장은 어떻게 바뀔까. 한.미 FTA가 2008년 국회 비준을 받아 발효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동차 시장의 변화상을 가상 시나리오로 꾸며 봤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품 가격이나 사양은 현재를 기준으로 했다.

2011년 10월 가을빛이 완연한 어느 날 오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실업의 K부장(47)은 책상에 놓인 자동차 홍보 팸플릿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7년째 몰고 다니던 2000㏄급 중형차를 대신할 새 차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임원 승진이 모레인 만큼 조금은 넉넉한 차를 골라볼 심산이다. 책상 위에 놓인 것은 2000㏄ 후반에서 3000㏄ 중반의 차 모델들.

K부장이 조금 큰 차를 골라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중대형차를 모는 부담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2008년 진통 끝에 국회에서 한.미 FTA를 비준하기 전만 하더라도 2000㏄ 초과 차량은 ㏄당 220원의 자동차세를 내야 했다. 그랜저 3.3(배기량 3342㏄)을 몰려면 한 해 자동차세만 73만5000원을 내야 했다. 그러나 배기량에 따라 5단계로 나눠 내던 자동차세가 한.미 FTA 발효로 3단계(1000㏄ 미만, 1000~1600㏄ 미만, 1600㏄ 이상)로 단순화되면서 중대형차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더 결정적인 건 차 값이 많이 내렸다는 것. 과거 8%이던 관세가 없어지면서 미국산 수입차는 소비자들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에 중대형 차에 부과되는 특소세도 지난주 한.미 FTA 발효 3주년을 맞아 5%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미국 차가 많이 보이는 것 같긴 하다. 몇 년 전만 해도 괜히 덩치만 크고 기름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국내 시장에서 맥을 못 추던 미국 차 값이 10%가량 내리면서 관심 갖는 사람이 늘었다. 2006년 5000대에 불과했던 미국 차 수입은 올해 1만 대를 훌쩍 넘길 기세라는 보도를 본 것 같다.

그런데도 홍보 팸플릿을 놓고 간 미 포드사의 딜러는 "손님이 많아지긴 했지만, 마진은 적어졌다"며 엄살이었다. "관세는 최종 소비자 가격이 아니라 '항만 인도가격'에 붙기 때문에 관세가 없어져도 실제 차 값에 미치는 인하 폭은 4% 정도"라는 설명이었다. 여기에 특소세 인하폭 5%를 더 빼면 세금만으로 차 값은 9%가 빠져야 한다. 그런데 최근 차 값은 과거보다 10% 이상 떨어진 것 같다. 업체들의 치열한 마케팅 경쟁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특소세가 내리는 효과는 수입차만 보는 건 아니다. K부장 책상 위에 놓인 현대자동차 홍보 팸플릿에는 '중대형차 특소세 5% 인하! 지금이 차를 키울 때!'라는 문구가 큼지막하다. 그 아래에는 '쏘나타 F24프리미어(2300㏄)는 2628만원에서 2477만원으로 151만원 인하, 그랜저 Q270 럭셔리(2600㏄)는 2971만원에서 2800만원으로 171만원 인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팸플릿을 고르던 K부장의 손길이 도요타 캠리에서 멈췄다. "어라, 이 차들이 왜 이리 싸졌나." 특소세 인하 폭보다 훨씬 내려간 차 값에 대한 의문은 이 차의 생산지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설명 문구를 보고 풀렸다. 이른바 미국산 일본 차의 우회 상륙이다. FTA 체결 초기만 해도 미국에서 차를 만드는 일본 업체들은 '미국 내 수요를 대기에도 바쁘다'며 한국 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요즘엔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 수입차 시장이 나날이 커지자 물량 일부를 한국으로 빼기 시작한 것이다. 운송비와 보험료 등 각종 비용(차량 가격의 약 2%)이 들어도 미국산 차에 대한 관세가 면제돼 가격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애국심만으로 차를 고를 때는 지났다는 것은 알지만, 왠지 아직 수입차를 선뜻 고르지는 못하겠다. 일단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문을 펼쳤다. 차 시장이 격변하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닌 것 같다. 신문에는 "한국차, 미국 시장에서 일본 차 맹추격"이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큼지막하게 나 있다. 미국에 수출되는 한국산 차의 2.5% 관세가 사라지면서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미국 차가 기지개를 펴고, 미국에서는 한국 차가 기를 펴고…." 한.미 경제에 국경이 없어졌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오후였다.

이현상.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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