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개국 … '대한민국 G7'시대 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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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길이었다.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피할 수 없는, 그리고 피해서도 안 되는 길이었다. 무역규모 세계 11위의 대한민국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12년간 두드리기만 했던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벽을 넘어 3만 달러 수준의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 나아가 안보까지 한국의 국격(國格)을 높이는 고속도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협상이 2일 타결됐다. 때마침 황사도 말끔히 가셨다.

이렇게 제3의 개국(開國)이 시작됐다. 거대한 개방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외압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전한 개국이다. 연간 1조7000억 달러 규모인 세계 최대 수입시장 미국에서 한국의 산업 전사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최강국 미국과 일대일로 맞붙어 한국이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다고 주장한다. 개방과 경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쇠락의 길로 밀려갈 수밖에 없음을 한반도의 역사는 잘 보여 준다.

조선 말 신미양요(1871)와 강화도조약(1876) 등 억지로 떼밀려 이뤄졌던 제1의 개국은 망국(亡國)으로 이어졌다. 18세기 정조가 이뤘던 찬란한 르네상스를 이후 세도 정치가들이 쇄국으로 망가뜨린 결과 같은 시기 선진 문물을 활발하게 받아들였던 일본에 억눌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1960년대 수출입국을 기치로 내세운 제2의 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 자동차.조선.반도체산업에 뛰어들 때 비관론자들은 두려워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한국의 산업 전사들은 세계 곳곳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심었다.

왜 지금 제3의 개국인가. 95년 1만 달러를 돌파한 뒤 한국 경제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새 성장동력을, 새 시장을 찾지 못해 주춤거리고 있다. 기업가의 동물적 충동이 사라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이를 극복하고 선진 부국인 서방 선진 7개국(G7)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세계 최대 시장을 '안방'으로 만들려는 게 한.미 FTA다. 샌드위치 신세에서 동북아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제3의 개국인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자발적 개방인 한.미 FTA가 진정한 선진국 진입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안보 차원의 한.미 동맹이 강해지는 효과도 기대된다. 부시 미 대통령은 이날 "협정은 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이끈 양국 간 유대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령 본사 고문은 "한.미 FTA는 한국 사회가 발전을 위한 '임계점(critical point)'을 넘어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선진화의 벽에 갇혀 있는데, 한.미 FTA가 선진화 동력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다.

하지만 제3의 개국은 이제 시작이다. 미국과의 협상은 마쳤지만 더욱 어려운 대내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 FTA로 피해를 볼 소외계층을 배려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하고,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일부 정치인과 시민단체를 설득해야 한다.

한.칠레 FTA 때보다 훨씬 거센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그때보다 더 세심한 대책과 진지한 설득이 필요하다. 진짜 협상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 자칫 대내 협상이 잘못돼 지금 제3의 개국을 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중진국 문턱에서 주저앉아 후퇴할 수 있다. 개국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할 때다.

이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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