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침략이 「진출」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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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군이 정신대를 모집하고 관리했다는 기록 문서가 발견되면서 한일간의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된 지금,아직도 일본 교과서는 임진왜란을 「정명가도」를 거절한 이유때문에 조선에 「출병」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제시대의 일본인 토지강탈을 「전답을 싼 값으로 매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목적은 민족적 개별성과 세계사적 보편성을 조화시킬수 있는 역사의식을 키우는데 있을 것이다. 제 나라의 역사만을 주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맹목적 미화를 일삼는 함정을 벗어나면서 이웃나라 또는 세계의 역사와의 연계속에서 상호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역사교육의 기본방향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이러한 원칙과 정부의 시정요구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게 일본 교과서는 한국부분의 왜곡을 시정하지 않고 있음이 최근 연구에서 드러나고 있다.
교육개발원 이찬희 박사팀의 조사에 따른다면 10년전 교과서 왜곡사건이후 우리 정부의 지속적 시정요구가 있었지만 극히 미세한 부분만을 고친채 핵심이 될만한 부분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침략을 「진출」로 표현한 부분,일제의 무단통치 관련 내용,관동대지진,정신대 문제 등은 개선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일 역사 교과서 전문가들의 그동안 토론에 따른다면 ①일본은 조선을 개항시켜 근대화를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②동학농민운동을 동학당의 난이라 규정해서 조선의 주체성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다 ③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대가로 조선은 완전 식민지화 되었다는 등의 논리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대목들이지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일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검인정 지침이 종래의 기술을 시정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양식있는 역사학자들이 수정 또는 시정 노력을 보일 경우 검인정 통과가 어렵다는 이유다.
이 말은 일본정부 스스로가 잘못된 역사 기술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강제동원했다는 사실을 다음 세대에 부끄러움으로서가 아니라 강한 민족의 자존심,제국의 치적으로 남기겠다는 저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경제·군사 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지금껏 우리의 작은 시정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고 침략의 과거를 계속 미화·은폐하려 한다는 그 사실이 과거의 문제를 벗어나 오늘의 위협으로 존재한다.
세계사 재편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의 향방이 어디인지,과거 피해를 받았던 동남아 모든 국가들이 촉각을 돋우고 있는 오늘이다.
공존 공영의 길을 택하려면 교과서의 왜곡과 시정은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일찍이 해결했어야할 기초적 의무였을 것이다.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맞으며 아시아 공존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 사업으로서 역사 교과서 문제는 이제 끝을 낼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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