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84. 세계패션그룹 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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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0년 패션그룹 대상 시상식이 열린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후배들과 함께 기념촬영했다. 필자(왼쪽에서 다섯번째)의 오른쪽은 함께 수상한 서울대 이인호 명예교수.

내가 패션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패션은 사치로 여겨졌다. 나는 모직협회.면직협회.잠사협회 등에서 주는 원자재 개발 공로상은 받았다. 하지만 패션디자인 관련 상복은 없는 편이었다.

1959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 때 미스 코리아 오현주 양을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디자이너협회로부터 베스트 드레스 상을 받은 것 외에는 수상 경력이 거의 없다.

1995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만 달러에 이르면서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의류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많은 분야에서 '기술 평등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분야에서 정보 교류가 활발해 지고 새로운 정보의 전파도 그만큼 빨라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디자인이란 게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뉴욕에 진출하기 전까지 30년 간 꾸준히 마케팅 리서치를 해 왔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뉴욕.파리.로마.밀라노.도쿄를 돌며 국제적인 트렌드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패션거리인 뉴욕 7번가에 진출, 성공한 것도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요즘 젊은 패션담당 기자들이 내게 "왜 당시의 선생님 업적을 한국에서 홍보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대답한다. "80년대 한국에는 뉴욕 패션계의 사정을 아는 사람도,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나는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내가 한 것을 일부러 알리거나 혹은 그것을 내세워 더 많은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모든 일은 내게 '도전'이었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대단한 야망도 없었다. 해내면 기쁜 일이고, 못해도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또 나에게 왜 국내 패션계의 후배 디자이너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나는 바쁜 일을 핑계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후배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다.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몇몇 후배들 탓에 전체 후배들과의 교류가 뜸했던 것이다.

그런데 2000년 겨울, 후배 디자이너들 모임인 '세계패션그룹'에서 나에게 패션대상을 주겠다고 알려왔다. 나는 그들의 배려와 성의가 고마워 상을 받기로 했다. 그들은 서울 하얏트호텔에 화려한 시상식장을 꾸몄다. 기념품과 적지 않은 상금을 준비했다. 나는 시상식날을 위해 만들어 둔 빌로드 롱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후배들이 주는 상이라 너무나 기뻤지만 그들을 위해 한 일이 없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날 많은 젊은 기자들이 처음 본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진 듯했다. 그 뒤 어느날 한 젊은 기자가 나를 찾아와 인터뷰한 내용을 패션잡지인 한국판 '바자(Harper's Bazaar)'에 실었다.

노라·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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