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민주화」 아직 안늦었다/박세일(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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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5년 해방이후 우리 국민적 염원의 하나는 이 땅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6·29이후 막상 민주화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요즘 우리 사회에는 오히려 불안감과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소위 민주화이후 경제적 투기와 과소비에 크게 시달려 왔고 아직도 생산적 투자의욕과 근로정신은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 반면 물가불안은 가중되고 있고 국제경쟁력의 하락도 지속되고 있다.
사회기강도 크게 문란해져 청소년범죄·관직범죄가 급증했고 부녀자납치·인신매매등 반인륜사범도 크게 늘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는 국가가 존재하는 제일의 이유인데 오늘날 민생치안을 보면,무엇때문에 우리가 정부에 세금을 내는지 모를 지경이다.
○문란한 사회기강
정치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정치는 국민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기는 커녕 국민들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는 정치불신이 아니라 정치기피 내지 혐오의 경향까지 나오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되고 있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을 민주화란 대장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도기적·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이렇게 되는 근본원인은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 잘못된 민주화,사이비 민주화를 하고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민주화」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민주화는 두단계를 거쳐 발전한다. 첫단계는 반민주질서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단계고,그 다음은 새로운 민주질서를 세우고 건설하는 단계다. 그런데 부정의 능력과 건설의 능력은 다르다. 따라서 비록 부정에는 성공했다해도 새로운 민주질서의 건설을 위해선 별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노력을 등한히 해왔다.
6·29이후에도 모두가 민주화를 소리높여 외쳐왔지만,과연 민주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문제,바람직한 민주화의 내용에 대해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바 없다. 원칙과 기준을 세운 바도 없다. 결국 민주주의 철학의 올바른 정립없이 모두가 아전인수식의 민주화,제멋대로의 민주화에만 열중해온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올바른 민주주의관을 세우지 안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두가지 배리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이 사회의 지도자들,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범인화」「보통 사람화」하고 있고,기회주의화 하고 있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리더십의 표류내지 공동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올바른 민주주의는 분명히 보통사람도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는 질서다. 그러나 결코 정치지도자가 보통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정치질서다.
○표류하는 리더십
자신의 안위나 소아적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바르게 강한」지도력이 있어야,그리고 멸사봉공의 정신을 가진 지도자가 있어야 비로소 민주주의는 성공할 수 있다.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는 본래 가치와 권위의 피라미드가 있어야 발전한다. 수평적 질서와 동시에 수직적 질서가 있어야 발전한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공의와 민생동기를 외면하고 지연과 학연을 볼모로 권력동기에만 놀아난다면 그러한 사회에서는 가치와 권위의 피라미드,수직적 질서체계는 붕괴되고 결국 민주주의도 실패하게 된다.
「잘못된 민주화」가 초래하는 두번째의 배리적 현상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공동체적 연대감·국민적 일체감을 잃고,개체화·원자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건전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고,반면 시민정신이나 시민윤리는 왜소화·황폐화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공공심과 공중도덕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있다. 그러면서 개체화한 국민들은 주체성을 잃고,지역이기주의·집단이기주의 등으로 「무리화」하고 군중화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민주주의 철학을 세워야 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중우정치도,인기에 영합하는 인민주의도 아니다. 수직적 질서체계의 부정도,지도자역할의 포기도 아니다. 민주적 이상과 개혁의지를 가진 「바르게 강한」리더십의 정립이 민주주의다.
또한 민주주의는 주인의식과 공공심이 넘치는 민주시민이 등장해야 성공할 수 있는 제도다. 공동체에 대해선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쉽게 군중화하고,분열되어 있는 국민들이 있을때 민주주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랫동안 우리는 저항과 부정의 정치문화속에서 살아 왔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의 「보통사람화」를 민주주의로 잘못 생각해 왔고,공의를 무시한 사익의 무한추구 자유를 민주화로 착각해 왔다.
○주인의식이 중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내년의 4대선거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4대선거를 통해 이 사회에 「바르게 강한」민주적 지도자를 내세우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스스로도 공의와 공공심을 갖춘 민주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도,소극적 비관도 아니다. 민주적 개혁의지와 실천용기를 가진 적극적 비관이 필요하다. 이 적극적 비관만이 이 사회에 진정한 민주화를 가져올 수 있고 정치와 경제도 살리고 사회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서울대법대교수·법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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