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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매화가 인사동에 피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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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을 느껴볼 수 있는 대형 기획전들을 이번 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홍익대 문봉선 교수의 '매.란.국.죽'전은 전통 사군자를 문인화가 아닌 현대 회화로 다시 해석한 게 특징이다 (20일까지. 02-739-4938).

우림화랑에서 열리는 '운보선생 빛과 향기전'은 작고한 대가의 다양한 모색과 분방한 필력을 다시 느껴볼 기회다 (15~30일. 02-733-3788).

◆'문봉선 매.란.국.죽'전=문 교수가 지난해 펴낸 책 '새로 그린 매란국죽'에 실린 작품 중 120여 점을 전시 중이다. 작품의 특징은 옛 화보를 답습하거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을 정확하게 사생해서 그렸다는 점이다.

작가는 "매화 하나라도 제대로 오늘의 심상에 맞게 그리는 것이 '이 시대 한국화'모색의 출발점"이라며 "중국식이 아닌 우리식으로 사군자를 그리기 위해선 직접 찾아가서 보고 그리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매화를 그리기 위해 섬진강변 매화농원과 선암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또 난초를 화폭에 담으려고 안면도 자연휴양림과 제주도 곳곳의 한란 군락지를 수시로 찾아갔다.

"국화는 영종도 해변에 지천으로 피는 토종이 으뜸이요, 대나무는 구례와 하동의 대숲이 제일입니다."

매화와 국화의 색은 아크릴로 표현했다. "흑백의 먹만으로도 색을 느끼게 하는 것이 동양화의 진정한 묘미지만 현대성을 더하기 위해 서양 물감을 입혔다"고 말한다. 그의 사생은 철저하다. 매화를 키우는 농부가 "그 자리에는 꽃이 달릴 수 없다"고 지적한 것에 충격을 받고 그림을 찢어버린 일도 있다. "올해 매화 꽃은 지난해 새로 난 가지에서만 핀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가지 끝엔 꽃이 달리지 않는다는 것도요."

중국에서 4년간 유학했던 문씨는 "중국이나 일본 것과 구별되는 '우리 사군자'를 그리고자 15년간 노력해 왔다"면서 "형태뿐 아니라 국화 잎을 스치는 가을바람, 난초 끝에 맺힌 이슬방울까지 담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운보선생 빛과 향기전'=미술계 거목이던 운보 김기창(1913~2001)화백의 작품 40여 점을 보여준다. 운보는 특히 예순이 넘은 나이에 우리 민화를 산수화와 접목시킨 '바보산수''청록산수'등을 발표해 끝없는 모색과 실험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바보 산수'는 최근 MBC 주말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청탁 뇌물로도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전시엔 '산사'를 포함한 4점이 나와 유머러스하고도 독특한 미학을 느껴볼 수 있다.

이와 별도로 병풍으로 그린 매화 그림도 특유의 맛을 느끼게 한다. 조선 화가들의 매화는 대개 간결한 데 비해 이 매화는 등걸부터 튼실하고 가지도 무성하다. 홍매가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 참새도 날고 있어 탐스러운 느낌이다.

신선도의 일종인 '채과선인(採果仙人)'은 소품이지만 똑 떨어지는 작품이다. 용트림하는 소나무가 있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시선을 끈다. 운보 그림에서 폭포는 시원한 맛과 '물소리'가 어우러진 교향곡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운보 전작집'을 만들 당시 선별위원이기도 했던 우림 화랑의 임명석 대표는 "대표적인 소장가 몇 분과 힘을 합쳐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면서 "'산사'를 포함한 10여 점은 이번에 첫 선을 보이는 미공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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