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4)-제87화 서울야화(1)|우리가 쓰던 「서울」 해방직후부터 일반화|"왜색일소" 신궁부터 없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한일합방전의 서울 이름은 「한성」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서 「경성」이라고 고치는 바람에 한국말로 「경성」, 일본말로 「게이조」가 되었다.
이래서 우리들은 총독부가 지은 「경성」이란 이름을 가지고 1910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36년 동안 살아왔다.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이 되자 우리들은 당장 「경성」이란 이름을 없애버리고 「서울」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썼다.
총독부에서 지어 우리들에게 억지로 쓰게 했던 경성이란 이름이 몹시 싫었기 때문이다.
서울이란 이름은 우리들이 예부터 써오던 아름답고 정다운 순수한 우리말이기도 했다.
경성이란 이름을 쓸 시대에도 우리들끼리의 대화에서는 경성 대신 서울이란 말을 많이 써왔었다.
『자네, 어디 가나?』 『응, 서울가는 길이야.』 이렇게 문답이 되었지 『응, 경성가는 길이야』하고 뻣뻣하게 나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서울이란 이름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우리나라 수도의 이름이었다.
서양사람이 만든 세계지도를 보면 어느 나라에서 만든 지도이건 간에 우리나라 이름은 「조센」(조선의 일본식 발음)이 아니라 「코리아」로 표기되어 있고 수도이름은 「게이조」 또는 경성이 아니라 「서울」로 되어있었다.
미국사람이나 그밖에 어느 나라 사람에게든 경성이라거나 「게이조」라고 하면 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어느 나라 도시인지도 몰랐다. 「서울」이라고 해야 비로소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모로 보든 서울은 우리나라수도 이름인 것이 분명했다.
다음으로 어떻게 해서 행정적으로 경성이 서울로 변하였느냐 하면 그것은 『서울시사』에 이렇게 기록돼있다.
1945년 9월9일 하지 미군사령관이 조선총독 아베에게 항복문서를 받은 다음 컬로프 소령을 서울시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한국사람 시장을 두지 않고 김창영이라는 그때 제일 높은 경성부청의 고급관리를 경성부 부윤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이범승을 경성부윤에 임명하여 한국측의 서울시장 행세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범승은 몇 달못가 사직하고 1946년 6월 김형민이 경성부윤에 임명되었다.
이와 동시에 경성부를 경기도청에서 분리시켜 서울시라고 부르게 하고 경성부윤을 서울시장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 뒤로 2년이 지나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8월 15일 윤보선이 정식으로 서울시장에 취임하고 서울시가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
이것이 행정적으로 본 시울특별시의 내력인데 비공식적으로는 해방직후부터 「서울」이 경성 대신 우리나라 수도 행세를 해온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해방 후 국가재건을 위해 우리들이 내건 표어는 「왜색일소」였다.
생활 속에 스며든 모든 일본색채를 빨리 없애버리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맨 처음 서울을 비롯해 우리나라 전 지역에 널려있는 소위 신사니 신궁이니 하는 일본의 도깨비 굴을 없애버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 중에도 서울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이라는 큰 도깨비굴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복했다는 표적이 되는 총본산이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제일 먼저 없애버려야할 것이었다.
수도 경성에 진좌했다고 내세우는 도깨비 총본산을 없앤 뒤에야 우리는 버젓한 독립국 행세를 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헐어버리고 부숴버린 뒤에 그 후련하고 시원한 기분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조선신궁이 없어진 뒤에야 서울은 정말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이 된 것이다.
그 뒤로 여러가지 왜색을 없애버리는 운동을 펼쳐왔는데 원체 오랫동안 쌓여온 왜색이라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서울야사』를 시작하면서 왜색을 없애버리고 정말 서울의 본태를 나타내는 일도 겸해 볼 작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