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남편생활백서] 미용실 고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1면

나는 아내에게 붙은 혹이다. 미용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를 보는 직원들의 눈빛이 그랬다. 그들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나를 취급하는 방식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차별을 통해 진정한 고객은 아내며 나는 그저 아내의 혹이란 사실을 내게 알린다.

"남자분도 머리 하실 건가요?" / "아뇨, 그냥 따라온 겁니다."

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카운터에 버려둔 채 아내를 모시고 가버린다. 나는 아내가 잠시 떼놓은 혹이다. 혹에게 미용실은 가혹하다. 너무 밝고 수다스럽다. 나는 어둡고 조용한 곳을 찾는다. 빈 자리라고는 여성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잡지를 뒤적이는 테이블뿐이다.

미용실은 오직 여성을 위한 공간이다. 남자가 읽을 만한 신문이나 시사잡지는 없다. 나는 여성잡지를 뒤적인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는 여성 속옷에 관한 기사와 사진이 나온다. 누가 볼까 민망해서 얼른 덮는다. 아내가 '파마'하고 염색할 동안 나는 이렇게 기다려야 한다. 아마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차라리 머리라도 자르는 편이 덜 지루할 것 같다. 잘라봐야 아내도 몰라볼 정도로 별 차이는 없겠지만.

"네? 커트 하시게요? 한참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마치 '지금 네 눈엔 손님들 기다리는 게 보이지 않느냐? 손님이 달고 온 혹 주제에'라는 말투다. 물론 나는 괜찮다. 어차피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새털처럼 많은 시간이 아닌가. 오래 걸리겠다고 하더니 금세 머리를 잘라주겠다고 한다.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나는 분홍색 가운을 몸에 두르고 동화에나 나올 법한 거울 앞에 앉는다. 거울 속에는 잘생기고 스타일도 멋진 남자 선생님들이 돌아다닌다. 그런데 아내는 나를 떼놓고 어디로 간 걸까. 나는 거울 속에서 아내를 찾는다.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한 남성 헤어 디자이너가 아내의 머리를 쓸어올리는 장면을 나는 발견한다. 아내는 기생보다 더 고운 웃음을 짓고 있다.

내 머리를 처리하러 온 여성 헤어 디자이너에게 나는 웃으며 기름기 잔뜩 낀 '지성'으로 말을 건다. 그러나 여성 헤어 디자이너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 물론 머리도 건성으로 자른다. 진짜 고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5분이나 걸렸을까. 나는 샴푸실로 넘겨진다. 형식적인 샴푸가 끝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선생님이 혹처럼 생긴 내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머리에 뭐 안 바르시죠?"

나는 대기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이제 머리도 잘랐고 할 일도 없지만 여전히 시간은 새털처럼 남았다. 나는 존다. 내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깬다. 옆에 앉은 여성들이 나를 노려본다. 나는 시계를 본다. 세 시간이나 지났다. 나는 혹이니 다시 아내에게 가서 붙고 싶다. 그러나 아내 가까이 갔다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선다. 기생 오누이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이 점잖은 분이신가 봐요?" / "아닌데…, 왜요?"

"보통 남자분이 따라 오시면 제가 좀 불안해지거든요. 자꾸 가자고 보채서요. 하하하."

"그러면 저한테 혼나죠. 아니 혹 나죠. 호호호."

나는 아내에게 붙은 혹이다. 미용실을 나서며 나를 보는 아내의 눈빛이 그랬다.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kimida@duonet.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