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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해빙, 위험한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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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6자회담 5개 실무그룹이 각개약진하면서 평화체제교섭기획단이 본격 가동하고, 남북한.미국.중국의 '한반도 평화포럼' 출범도 꿈틀거린다. 한국전쟁을 치른 적대국 정상들이 한데 모여 한반도평화체제를 논의하는 '화려한 이벤트'도 그려진다. 2.13 합의의 샴페인에 너무 취한 탓인가.

2.13 합의는 '외교적 성과'로 포장된 미국의 전략적 패배였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비핵화라는 지루하고 긴 여정을 13년 만에 재연한 꼴이 됐다. 북한은 그 사이 핵실험을 하고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 행세하고 있다. 이미 개발한 핵무기와 핵물질을 가진 채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약속한 것을 모두 얻어내고 미국 및 일본과 양자대화의 길까지 열어젖혔다. '장군님의 배짱과 담력'을 칭송하며 북한이 기고만장할 만도 하다.

북핵 해결의 핵심은 핵무기 폐기다. 그러나 다급한 부시 정부가 합의에 급급해 합의문안에 핵 폐기를 명시하지 못했다. 핵의 폐기는 '불능화'로 표현이 누그러졌고, 북한이 핵 폐기를 약속한 2005년 9월 공동성명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한다는 간접적 언급에 머물렀다.

초기단계에서 북한이 약속대로 영변 원자로를 동결한다 해도 새로운 핵 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핵 폐기 요구에 북한이 핵 군축 요구로 맞서는 것만 짐작이 간다. 앞으로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얼마나 성실하고 믿음이 가게 신고할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북한이 진정으로 핵을 폐기하려 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핵 능력은 북한의 유일한 협상카드다. 따라서 초기 보상 조치 등을 얻어낸 뒤 합의를 어기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우려되고 있다.

2.13 합의에 일본열도는 대실망이었다. 납치 문제 미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핵 폐기를 고집했지만 미국의 무게에 눌려 합의문안에서 빠졌다. 한반도 비핵화에 관해 미.일 간에 미묘한 시각차도 놀랍다.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존재에 대해 미국이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 등 핵 폐기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의지마저 의심받고 있다.

북.미 국교 정상화 협상 개시에 한국 당국이 유독 들떠 있다. 그러나 절차를 시작하는 것과 정책을 바꾸는 것은 별개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북 지원에 뛰어들거나 평화체제 논의로 김칫국부터 마실 때가 아니다. 남북관계 진전은 비핵화 이행과 철저히 연계해야 한다.

핵 동결이나 핵 폐기에 상관없이 북한은 서울을 초토화할 수 있는 가공할 군사력과 미사일을 전진 배치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정치'로 한.미 동맹 정신은 이미 크게 훼손됐다.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면 주한미군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전략적 유연성을 담보할 양국 간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유사시 미군 증원은 보장이 없다. 명분이 뚜렷해도 전쟁이 질질 끌고 사상자가 많아지면 발을 빼는 미국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아왔다. 전작권 전환 역시 북한의 핵 폐기와 연계해야 한다. 믿을 수 없고, 멀어져 가는 미국이지만 우리 필요에서 바짓가랑이를 잡는 전략적 용미(用美)가 현실적인 안전장치다.

대북 포용 정책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체시킨 채 독재체제를 강화시키고 남한 사회 전반에 안보 불감증과 심각한 좌경화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대북 지원 카드로 6자회담에서 바람을 잡고, 확실한 핵 폐기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평화체제 논의를 서두르고 있다. 전쟁만 안 나면 북핵도, 통일 후 체제도 문제가 안 된다는 말인가. 핵을 가진 북한과 평화공존을 추구한다면 그 평화란 어떤 평화인가. 2.13 해빙의 급물살에 덤벙대다 정작 대한민국이 떠내려가는 비극의 봄을 우리 모두 경계해야 한다.

변상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