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왕희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중국 서예의 역사에서 왕희지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무게는 헤아릴 수 없다. 해서(楷書)와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 대표적으로 꼽히는 세 종류의 서체를 완성해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떠받들여지는 정도이니 말이다. 그에 관한 일화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결혼에 얽힌 에피소드는 꽤 흥미롭다.

동진(東晋) 왕조를 건설하는 데 공이 컸던 왕도는 그의 백부다. 승상을 맡고 있던 왕도에게 당시 태부의 직에 있던 치감이라는 권세가가 혼사를 거론한다. 왕도의 조카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고 싶다는 얘기였다.

왕도는 "직접 사람을 보내 고르시오"라는 대답을 한다. 며칠 뒤 치감은 자신의 수하를 보내 사윗감을 물색한다. 권세가의 사위라는 자리에 탐이 났던 모양이다. 왕희지의 형제들과 사촌들은 몸을 단장하고 차림새를 가다듬는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 이리저리 모여 앉아 토론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단 한 사람, 왕희지는 침상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누가 왔는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의 왕희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 위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필체를 가다듬는 연습 중이었던 셈이다.

치감은 결국 배를 드러내 놓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왕희지를 사위로 선택했다. 집안 자제들이 머무르는 동쪽 건물의 침상에서 배를 내놓은 사람이라는 뜻의 '탄복동상(坦腹東床)'은 그에 관한 성어다. 지금은 '훌륭한 사위'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 몰두했다. 장지의 서법을 익히기 위해 연못가에서 하염없이 글자를 써 내려 간 끝에 못 물이 모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는 '묵지(墨池)' 일화는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 주는 고사다. 길을 걷다가도 멈춰 서서 하염없이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노력으로 그에 앞서 필명을 떨쳤던 서예가의 필법은 그의 솜씨에 모두 녹아들었다. 그 뒤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왕희지는 중국의 서체를 모두 아우르고 꽃피운 필법의 완성자가 된다. 처절한 노력의 결과다.

비전 없는 이공계가 싫어 의대에 편입학한 우수 학생의 이야기가 화제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여야 왕희지와 같은 인물이 나온다. 요즘처럼 과학이 국가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대에 우수 학생들이 이공계를 떠난다니 머리가 멍해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명리만을 좇는 젊은이들을 탓하기에 앞서 오늘의 이공계를 만들어낸 한국의 현실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