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스스로 본드가 돼라' … 본드걸의 임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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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007 Saga에 관한 몇 가지 Cliche

언제부터 '007'이 '공공칠'로 불렸는지 모르겠다. 무슨 연유로 '영영칠'이나 '빵빵일곱'이 밀렸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007은 우리 사회에서 오로지 공공칠로 합의됐으며 다른 방식의 호명은 모두 도태하고 말았다(참고로 '09'는 '영구'로 통일되었다).

007 시리즈가 세기의 전설(Saga)이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62년 첫 시리즈가 개봉한 뒤로 반백 년 가까이 흥행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건, 21편에 이르는 에피소드마다 새롭고 신기하고 낯선 걸 들이댔기 때문이 아니었다.

007이 공공칠로 정착된 것처럼, 007 시리즈는 정형화된 패턴 속에서 움직였다. 007의 성공 비결은 의외로 낯익은 것(클리셰.Cliche)을 확인하는 재미에 있었다. 007시리즈는 아래와 같은 문법을 철저히 지켰다.

지구 정복의 야욕에 불타는 괴팍한 그러나 돈 많은 악당, 여차하면 첨단무기로 둔갑하는 롤렉스 시계와 BMW 스포츠카, 여기에 예쁘다기보다는 섹시한 본드걸까지. 이들은 모두 단 한 명의 백인 남성을 위해 존재 또는 복무했다. 늘 자신을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소개하는, 그리고 한결같이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고 주문하는 호색한 영국 스파이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007은 동일한 수법을 우려먹었다. 그러다 보니 패러디(Parody)나 아류가 쏟아졌다. 제임스 본드의 성적인 부분을 강조한 코미디물 '오스틴 파워' 시리즈도 있었고, 액션물 '트리플 X'는 정장만 고집하는 007 시리즈의 힙합형 변주였다.

# 본드가 된 본드걸

여태의 숱한 007 패러디가 놓쳤던 바를 통쾌하게 지르고 나온 소설이 한국에서 나왔다. 오현종(34)의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문학동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에피소드마다 나타났다가 바로 폐기됐던 본드걸을 무대의 중앙으로 옮겨놓는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이다.

본드걸 미미양은 본드로부터 차인다. 미미양이 활약한 에피소드가 끝났기 때문이다. 미미양은 복수를 결심하고, 본드걸이 아니라 본드, 다시 말해 스파이가 되기로 작정한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미미양은 스파이 013이 되고 임무를 완수한다.

소설은 재밌다. 특히 본드와 본드걸의 옹색한 일상을 묘사한 대목은 만화처럼 유쾌하다. 임무를 마친 본드는 소파에 누워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한국 아저씨의 전형이 되고, 본드걸 미미양은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영락없는 청년 백수로 전락한다. '스파이도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란 표현에선 아예 쓰러졌다.

하나 서구의 대중문화를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이미 클리셰의 영역이다. 강병융은 단편 '낙찰'에서 슈퍼맨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늘어놓았고, 박민규는 미국 만화의 온갖 영웅부터 미 프로레슬링 선수까지 소설에서 진작에 써먹었다.

그런데도 소설을 주목한 건 작가의 범상치 않은 속내 때문이다. 언뜻 007 패러디로 보이지만 소설은 외려 여성 로맨스에 가깝다. 왕자님과 포옹하면서 끝나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왕자님을 딛고 일어서는, 다시 말해 여성 스스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최근의 여성 로맨스 문법에 소설은 충실하다. '본드걸 미미양의 오디세이'라기보다는 '스파이 013의 창세기'인 것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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